중증근무력증으로 건강을 잃은 자가 회복 될 때

중증근무력증으로 건강을 잃은 자가

회복 될 때




| 남들보다 건강한 신체 조건을 타고 났던 나는 밤샘을 즐겼다.

누구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걸 자랑삼아 했고, 자판기 커피를 하루 10잔에서 15잔까지 마시는 생활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그렇게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debauchery life


하지만 연구원 생활 1년, 곧 결혼한지 1년 만에 중증근무력증을 앓게 되었고 모든 사회생활은 물론 화장실에 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까지도 철저하게 제한받는 생활을 살게 되었다.


눈물로 기도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예슈아를 향해 매일같이 부르짖었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내용 중 치유받은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나도 이처럼 될 수 있다며 '믿음(belief)의 선포'를 연일 품어 댔었다. 숱한 치유의 은사자 분들, 예언자 분들을 만나 안수기도를 받았다. 기도 한 방이면 잃어버렸던 예전의 그 건강을 단순에 되찾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러나 이내 믿음(belief)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덧 그 믿음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 내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수준에서 건강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혼자서는 화장실 볼 일도 제대로 볼 수 없던 이가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게 되었고, 상가 3층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도 버거워 했던 자가 3층 교회 전체를 청소하기까지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그런 회복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한결같이 요청하듯 말하였다.


"집사님. 조금만 더 주님께 매달리듯 기도해 보세요. 치유를 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집사님. 내면의 죄을 깨닫게 해달라면서 회개에 더 집중해 보세요. 그리하면 치유가 될 거예요"

"집사님. 신체의 치유가 늦은 이유는 집사님이 아직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세요."


등등 여러 이유를 설명해 주면서 내게 부족한 신앙적인 모습을 돌이킬 수 있게끔 많은 조언들을 주셨다.


"주님의 뜻을 듣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다 보면 주님은 반드시 주님의 시간에 저를 회복시키실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절히 치유받고 싶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가장 빠르게 치유될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내 설명은 교회(공동체)안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곤 했었다.

몸의 불편함이 있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운 나는 교회(공동체)안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 학생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학생 2명을 모아 놓고 수학 수업을 진행하던 중 2달 즈음 지났을까? 그들이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하길래 나역시 그럼 그렇게 하라고 흥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3달 정도 지났을까? 그 학생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수학 공부에 대해 조언해 주길 바란다'는 식의 대화를 신청하였다. 그러자 수학 공부에 대한 조언을 성심껏 해 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보라며 학생을 돌려 보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내는 "그 아이는 당신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의도로 다가왔었는데, 당신은 조언만 하고 보내는 게 어디있어요!"라고 내 행동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내가 먼저 다가가 그 학생에게 수업을 해 주겠다고 했죠. 그러나 그는 나를 거부했죠."

"이번에는 그가 내게 다가 왔네요. 그에게 내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베푸는 그 수업에 대해 그 학생은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든 싫다는 느낌이 들면 또다시 내 수업을 거부하게 되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수고없이 얻는 자는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해 어떠한 감사나 가치도 두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내 수업에 대한 가치를 느낀다면, 비록 내가 거부했다 할지라도 다시금 내게 찾아올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노력을 하는 게 이치이기 때문이죠."


당시 아내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한 번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모습이 필요한 것이라 말하면서, 어린 학생에게 너무 과한 것을 요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3년이 흘렀다.


아침에 교회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폭염 때문에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신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몸은 오히려 상쾌하게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 내게 한 깨달음이 임했다.


평소 건강했던 이가 어느 순간 심각한 질병에 걸려 아팠다고 가정해 볼 때, '그가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금 찾게 되기 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느냐?'는 질문이 내게 슬며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명확한 답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 흔한 계절감기에 걸린 상황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제대로 쉬면서 즐겁게 일을 했더라면 감기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너무 무리하게 일한 탓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에 걸리게 되었다. 그때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친다고 해서 잃어버렸던 건강이 일순간에 회복되는 일이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면, 그의 마음이 진실하게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뉘우친다면, 그는 아픈 상황에서 만큼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첫 순간으로 삼아야만 한다. 


평안히 쉬고 마음의 부담을 해소하며 매일 매일을 가족과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할 때, 그의 건강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회복되게 된다. 약을 먹어도 7일, 약을 먹지 않더라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소요되어 갈 때, 삶의 방식을 바꿔나간 이는 자신의 회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건강을 되찾게 된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한 번의 회복을 맞보았다는 그 사실로 삶의 결실은 끝난 걸까?

아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자는 또다른 계절감기를 직면하게 될 때, 감기를 일으키는 코로나 또는 리노 바이러스 등에 정복당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맞서서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그저 회복에만 집중한 자는 여전히 계절감기가 유행하는 시기가 올 때마다 코로나 또는 리노 바이러스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이다.






고로 잃어버린 건강은 그의 마음이 깊이 있게 반성을 한다 할지라도 #곧잘_회복시켜주지_않는_이유'가 있다. 그릇된 삶의 방식을 바꿔 각종 바이러스와 싸워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러할 때, 자신이 갖게 된 건강에 대해 소중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건강을 잃은 자가 마음 속 깊이 뉘우칠 때마다 곧잘 회복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는 다시 얻게 된 건강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마치 어린 아이가 과자를 사달라고 할 때마다 주저함 없이 과자를 사주게 되면, 과자는 물론이고 과자를 사주는 부모의 마음과 물질에 대해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소중하다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해도 쉽사리 얻지 못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건강에 대해 소중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건강을 등한시 하며 살았던 지난 날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그렇게 반성하는 마음을 토대로 삶의 바꿔나갈 때 그 수준에 맞춰 건강을 조금씩 조금씩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은 건강 그 자체를 주시기 보다는 건강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우리 내면에서 길러지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 살았다가 다시금 주님께 다가가는 그 모습도 이와 같다.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주님을 거부했다.


이후 우리 자신의 삶이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위태롭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부르짖음이 있지만 주님은 쉽사리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는다. 예전 주님이 먼저 기쁘게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것처럼,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이제는 냉냉해진 주님의 모습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중만을 들려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신의 의중만을 들려주실 뿐.


하지만 내가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의중, 곧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내 삶을 드리는 것을 하루 하루 살아가게 되면 그때 내게서 등을 돌리셨던 주님의 귀가 나의 숨소리를 살포시 귀담아 듣게 된다. 그러면서 행여나 내가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내심 걱정하시다가 이내 주님의 눈동자까지 수고하는 내게로 돌아오신다. 이렇게까지 주님이 나를 향하게 되기까지 나의 경우는 10년 이상이 흐른것 같다.


그리곤 주님은 오늘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왜 너의 건강을 단 한 순간에 치유해 주지 않았는지 아니?"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 위함이었단다."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너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게 되기를 나는 누구보다 바랬단다."

"그래서 너의 그 고통과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건강을 줄 수 없었단다."

"네가 건강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너의 마음 가운데에서 생겨나야 했기 때문이란다."


중증근무력증으로 투병한 지 10년이 넘어 11년째를 향해 가고 있는 오늘.

폭염 속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땀에 온 몸을 흠뻑 젖셔야 했던 그 순간에 내게 주신 예슈아의 그 마음.

폭염 때문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까지도 생기로 가득 채워주시는 구나.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길 누구보다 바라시는 예슈아의 그 마음을,

감히...

감히 내가 알아 버린

오늘은 참으로 복된 하루구나.


A day given by Yeshuah is the present.


#중증근무력증,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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