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그가 진실을 밝히길 꺼려한다.

목격자.

그는 어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 소극적이거나 꺼리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런 목격자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라거나 또는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말로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자기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일, 곧 자기의 이익에 지대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거부하려 하겠는가? 국회의원 선거 기간이 되면, 평소 화려하고 근엄한 차림의 그들이 서로 앞다투어 하층민의 복장을 하고서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동행하는 그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연출하곤 한다. 상류 사회에 계층인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낮은 계층민처럼 입고 먹고 웃기를 자청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원직을 얻고 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소위 정의를 위한다던 그들의 공약은 말로써 맺은 허무한 약속이 되어 버린 채 그들은 상류 사회의 지배자가 갖는 모습으로 국민들을 군림하려 한다. 소외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하층민의 터전으로 내려오길 꺼려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정당이 추구하는 이익과 노선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를 펼치는 정당활동은 철저한 이익집단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심리적인 모습 대부분은 정치활동에서 여실히 관측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가 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길 꺼려하는 목격자'라는 부분 역시 정당활동을 펼치는 정치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 내 정당의 이익과 부합된다면

그곳이 지옥 끝이라 할지라도 정치인들은 과감하게 뛰어든다. 하지만 자신의 정당 이익과 불일치한다면 그곳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부한다. 이익에 부합되느냐 혹은 부합되지 않느냐에 따라 목격자는 진실을 밝히려 하거나 혹은 진실이 밝혀지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럼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다른 많은 경우들이 있겠지만, 한 가지의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자신의 삶의 일부가 그 사건과 교묘하게 엮여 있을 경우다. 즉 사건의 목격자로 나서야 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이 폭로될 경우,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이점보다는 자신의 이중적 사생활이 만천하에 알려짐으로써 겪게 될 피해가 더 큰 경우라 할 것이다.


가령, 이런 일을 생각할 수 있겠다.


어느 점잖은 중년 신사가 있다. 그의 직업은 대기업 임원이며 다정한 가정이 있는 자다. 디지털 카메라로 주변을 찍는 일에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하루는 열심히 주변을 찍었는데, 자신도 의도하지 않는 장면이 담겨버린다. 곧 살인 사건 현장을 의도치 않게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버린 것이다.


이윽고 경찰이 오고 사건 현장은 조사를 마친 뒤 재판이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련이 없는 엉뚱한 사람이 피의자(용의자) 신분으로 재판장에 서 있는 것이다. 피의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모든 정황과 검찰의 입장은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때 누군가는 한 중년 신사를 지목하면서 그가 사건 장소의 근처에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중년 신사에게 증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보통 때 같으면 기꺼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물론 증거물이 되는 디지털 카메라를 법정에 제출하면서. 하지만 지금의 중년 신사는 몹시도 망설인다. 사건 현장을 직접 보았고 카메라에 분명하게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인다. 그리고 애써 시선을 회피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의 디지털 카메라 안에는 그의 부적절한 이중적 사생활 영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중년의 여유롭고 온화한 자신의 외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중년 신사의 이미지 이면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몰카범의 이미지가 자신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나가는 여성들의 신체 특정부위가 근접 촬영되듯 찍혀 있는 그 영상 뒤편에 조그마하게 담겨 있는 살인 현장의 모습.

※ 판결에 결정적인 불리한 증언을 할 사람에게 몰래 다가가 그의 비리를 들춰냄으로써 증언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압박과도 동일하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와 함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게 될 상황을 두고 그는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우리들 자신은 그런 파렴치한 일을 행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런 파렴치한 행동들을 했던 중년 신사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말한다.

모두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고.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막상 진실 앞에 나아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나의 수치를 드러내야 할 상황들이 비일비재하다. 다만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예슈아를 믿는 신앙인들의 경우 특히 더욱 그렇다.

'용서하라'는 말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 신앙인들. 그래서 누군가 용서를 했던 상황이라던가 어려운 형평 속에서도 이웃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었던 간증을 하게 될 때면, 모두들 힘써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런 기쁜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 우리들의 감정은 충분히 고무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의 삶에서 누군가를 용서 해야 하는 시점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단순히 용서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용서를 하기 위해선, 자신의 나약함을 먼저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자신의 자존심을 짓누른다.

비굴하게 당해야만 했던 지난 날의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비굴하리 만큼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가해자의 행동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나는 본래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할 그런 하찮은 존재였었다."

"그런데 예슈아께서 그런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찮았기에) 내가 받았던 그 고통은 '예슈아께서 귀한 존재로 여겨준 지금의 은혜'에 비하면 그것 역시 하찮은 것이 된다."

"나는 기꺼이 내게 고통을 안겨준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슈아의 사랑이 그 고통보다 더 크고 값지기 때문입니다."


진실 또는 진리 앞으로 한 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담대함과 그에 상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록 어두운 곳에 숨겨져 있던 내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치부를 빛 가운데서 당당하게 대면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을 때, 빛 가운데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반면 빛 가운데 드러난 자신의 치부에 끝이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는 빛을 떠나 더 깊은 어둠 가운데로 들어가고 만다.


입술로는 빛 가운데로 나아가길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자신의 치부를 대면하는 일은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은 '넉넉한 십일조'와 '넉넉한 감사헌금' 등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마치기를 마지 않는 이들이 많다. 더 이상 삶의 비밀스러운 부분들이 드러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교회(공동체)에 물질적인 필요만을 채워주는 그런 도움만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모든 일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은 과정의 일부만을 담당할 뿐, 모든 일은 반드시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끝마쳐야 한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 일을 시작하고, 마음의 중심에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임하여야 한다. 물질은 그저 과정을 다양하게 만들뿐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어제의 나를 부인해야 한다'(엡4:22~23)고. 그 의미는 '어제까지 내가 만들어 놓은 옛사람의 나는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어제까지의 내 모습을 보완/수정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적인 다짐과 함께 피 흘리기까지 변화하려 노력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머리속 지식의 차원에서는 인정이 되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려 할 경우 너무나 어렵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결정했던 일들이 그릇된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자수성가 한 사람들, 그리고 성직자 처럼 신학적 영역에 몸담고 있는 분들 일 수록 자신의 어제 모습을 그릇되다고 여길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뜻 보면 그게 머 그리 대수롭겠느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로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서는 어제의 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모든 일들은 진리 위에서 출발한다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의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진리 위에서 인생(이론)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는 거짓되고 그릇된 생각 내지는 사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게 너무나 괴로운 것이 된다.


인간의 한계다.

악하다는 것과 잘못되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실이다.

악하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과 지극히 상반된 개념인데 반해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석과 수정/보완'을 통해 드러난 잘못을 바로 잡기만 하면 된다. 그럴 경우 더욱 온전한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발언은 오히려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말이 된다. 고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이는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자'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벅찬 부분이 있다.

흔히들 잘못되었다는 표현을 마치 '당신은 악하다'는 것으로 인식한다. 엄연히 잘못된 오해이고 왜곡된 인식이다. 우선 이러한 왜곡된 인식부터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지난 날의 잘못을 다시금 바로 잡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를 위해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을 당당하게 직면하면서 고통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간증을 들어보다 보면 자신의 부끄러웠던 지난 과오들을 수줍듯이 고백하는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바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당당하게 맞서 보자.

내일의 태양이 더 밝아 보일 것이다.

특히 당신을 비추는 부분에서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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