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속 창세의 비밀] 바라바였기에 계획되었던 구원


성경에는 여러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그가운데에서도 대부분의 성도분들이 쉽사리 혼동하는 이름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바라바와 바나바를 들 수 있다. 이 두 이름의 특징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발음상의 유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라바와 바나바의 이름과 같이 '바~'로 시작하는 이름들이 몇 더 있다.

'바요나 시몬'이라 불리는 '시몬 베드로'와 소경 '바디매오'라고 불리는 '소경된 디매오의 아들'이 있다.


먼저 바요나와 바디매오 등의 이름들 역시 바라바와 바나바처럼 '바~'로 시작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별 의미없는 명명법의 하나일까? 라는 식의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러한 의문에 대해 나름 명쾌할 수 있는 설명을 나눠보기로 한다.


| 바요나 시몬 베드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6~17(개역개정)


시몬 베드로를 향해 '바요나'라고 말씀하셨다.

'바요나'의 뜻은 무슨 의미일까?



바요나(Bariónas)는 'son of Jonah or Yonah'의 의미로서 'a surname' 또는 'a family name'에 속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an Israelite prophet) '요나'(Yonah; יוֹנָה)의 후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는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5~16)

의 부분을 보면, 베드로는 제자들의 수준으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명쾌한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슈아의 응답이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왜 뜬금없이 '혈육'을 언급하셨을까?하는 대목이다. 바로 앞 구절까지는 그저 '시몬 베드로'로 라고 언급되던 것이 곧바로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의 자손아'라고 표현이 급반전된다. 그러면서 '너의 혈육이 이 사실을 알게 한 것 아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문의 저주와 믿음의 가문이 받는 축복'이라는 게 있다. 몇 대째 믿음의 가문이냐는 말로 내 앞에 있는 이의 영적 수준을 판가름하는 것과 함께 반대의 의미로서 조상의 잘못으로 인하여 내 생애에 나타난 힘든 삶을 저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는 어떤 상황일까? 전자의 경우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집안에서 태어난 후손이기에, 선지자의 기운이라고 할까? 옆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그렇지. 암 그렇구 말고. 선지자의 집안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라도 머가 다르단 말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특히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표현이지만) 예슈아의 수제자로 여김을 받는다라는 사실과 그런 그가 선지자 집안의 후손이었다는 조건에서 이같은 명쾌한 대답을 했다는 사실은 신앙 공동체의 리더로 선택되기에 합당한 조건처럼 여겨질 수 있다. 


'최소한 이정도의 스펙은 가져야 예슈아의 수제자가 될 수 있는 거란다.'

하지만 짐작컨데 예슈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선지자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하였다.'는 것이다. 출신과 신분이 부합된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합당한 자 라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점이 부각된 표현이란 의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신분과 출신을 떠나 누구든 예슈아를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 되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조상 때문에 혜택을 받았다는 점은 하나도 부각되지 않는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예슈아는 요1:12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시고서, 베드로와 같이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들을 향해 기쁘게 말씀하신 것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 소경 바디매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10:46)


성경에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먼저 언급된 상황에서 '바디매오'라고 나와 있다. 어찌보면 '역전 앞'이라는 말로써, '역앞 앞'이라는 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추측해 보자면, 사실 '바디매오는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한 자'였으리라.

사람은 태어날 때, 이름을 갖는다. 부모에게서 이름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것같은 그런 자녀의 경우, 그의 이름을 호적에 올리는 비용조차 아깝게 여기는 나머지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바디매오가 그런 경우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는 고아가 아니겠지만, 그 집에서는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그런 자였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런 자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예슈아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어느 누구하나 그 사람의 불쌍함에는 안중에 없다.


예슈아의 오심을 환영하고 함께 동행하듯 여리고의 길을 걷는 허다한 인파들이지만, 정작 예슈아의 본질에 해당하는 '불쌍한 자를 찾아 긍휼을 베푸는 일'에는 안중이 없다. 게다가 불쌍한 자가 스스로 예슈아를 향해 "자신이 여기 있습니다."는 사실을 알릴려고 하는 그 행위조차 방해하고 있다. 예슈아와 즐겁게 거니는 자신들의 즐거움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슈아는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 어떻게 이러한 연결고리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이름이 없지만, 이름 대신에 불려진 그 지칭하는 말을 살펴보자.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디매오는 'highly prized'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소경 바디매오는 '존귀한 자의 아들'son of highly prized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사61:1)

주의 영이 나와 함께하시는 그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 아니겠는가? 가난한 삶에 갇혀있고, 질병에 사로잡혀 있으며 상한 마음에 묶여 있는 존귀한 자를 찾아서 다시금 회복시키는 것이지 않겠는가? 소경 바디매오는 바로 예슈아가 찾고 찾으시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바로 그 존귀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


| 바나바

바나바는 바라바와 혼동하기 쉬운 이름이지만, 사도 바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역동료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역시 '어느 가문의 출신'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는데, 그는 'son of Nabas'로서 예언자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행13:1a)


Nabas의 추정되는 어원은 Nebi(נְבִיא)로서 그 의미는 'a prophet'(예언자)다. 물론 Nebi의 아람어식 어원은 Nabi다. 역시 'a spokesman, speaker, prophet'의 뜻을 갖는다.


바나바의 행적은 단순한 인간의 지식에서 비롯된 계획이라 여길 수 없음이 바로 그의 이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다메섹에서 눈이 먼 후 고향 다소에서 잊혀진 자로 지내고 있다 할지라도 지난 행실들이 너무나 포악한 나머지 어느 누구도 품으려 하지 않은 사도 바울을, 바나바는 능히 품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주님의 뜻을 분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바라바


바라바라는 이름은 바나바와 함께 혼용되어 사용되듯, 매우 유사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바나바와 너무 다른 포악한 자였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At that time they had a notorious prisoner, called Jesus Barabbas. So after they had gathered, Pilate said to them,Whom do you want me to release for you, Jesus Barabbas or Jesus who is called the Messiah?’” (NRSV).


신개정표준역(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성경을 보면 바라바의 이름 앞에 'Jesus'라는 표기가 함께하고 있다. 놀랍지 않는가? 그래서 빌라도의 말을 인용하자면, 


"예수 바라바와 (너희가) 메시아라 부르는 예수 중 어떤 예수를 풀어주길 바라느냐?"

‘Whom do you want me to release for you, Jesus Barabbas or Jesus who is called the Messiah?’

라고 묻고 있다. 이를 더 쉽게 말하자면, '윗마을 철수냐 아니면 아랫마을 철수냐?'라는 식의 표현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성경 필사자들'이 그리스도 예슈아의 이름을 존중하기 위해 전범자의 풀네임에 있는 예슈아를 삭제했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Jesus(Joshua의 그리스식 표현)의 이름은 '철수, 철희' 등처럼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십자가 사건 당시 예슈아와 맞교환 될 전범자 역시 예슈아였다는 것이다.


그럼 전범자 예슈아 바라바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어떤 악행을 저질렀을까?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막15:7)

을 보면, '민란'이라고 표현된 헬라어 'sustasiastés'(συστασιαστής, οῦ, ὁ)는 rebel(반항; 반란군)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는 누구를 향한 반항이었을까? 식민통치를 펼치는 '압제자 로마'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란'이라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식민통치에 반항해서 로마군시설과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화와 약탈 등을 일삼았던 건 아닌가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단순히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약탈을 일삼는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름의 항쟁을 펼쳤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럼 로마의 행정관 내지는 로마에서 임명한 총독의 입장에서는 바라바와 예슈아 가운데 어느 누가 더 중범죄에 해당할까? 단순히 교주 노릇을 했다는 자와 식민통치에 반항한 반란군 가운데 어느 누가 더 죽어 마땅한 자일까? 이런 질문은 그저 넌센스일 뿐이다. 일제치하 때 어느 누가 많이 죽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답은 가장 명료해질 것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바는 나쁜 자가 아니다. 대신 종교적 혼란을 야기하는 예슈아의 경우는 극악무도하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는 유대인의 절기를 맞이하여 누군가를 풀어주는 전례가 있음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바라바와 예슈아' 가운데 누구를 풀어줘야 함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여러분이 빌라도 였다면, 어떻게 판단했을까?

로마 황제의 녹을 먹고 사는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국가에 반역한 자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통치함으로써 본국의 정치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아야 한다면, 당연히 식민지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빌라도에겐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최악의 수가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빌라도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무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로마 황제에게 참소한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최악의 순간이 된다. 빌라도로서는 어찌되었든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을진데, 그 판단은 '교주 행세를 한 젊은 유대인'을 풀어주는 것이 안정적이라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유대인들의 거센 항의는 자칫 예루살렘에 파견된 군사력만으로는 억제하기 어려운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반란군 바라바를 풀어줘야만 했다고 생각된다.


그럼 바라바라는 그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길래, 예슈아의 십자가 사건에 포함되었을까? 그것도 예슈아와 같은 이름을 가진 채로.


강도 바라바(Barabbas)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son of Abba'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강도로 익히 알려진 자의 이름치고는 너무 뜻밖의 의미이지 않는가? 그 의미는 과연 무엇과 연결될 수 있을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예슈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게 된 '그 자녀'를 일컫는다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녀를 구원하기 위해 예슈아께서 대신 죽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님의 뜻이지 않겠는가?




강도였다고 알려진 바라바는 사실 단순 강도가 아니라, 탄압받는 민족을 위해 압제자에게 대항했던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11:2~3)

요한은 로마의 압제자에 의해 옥에 갇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 베임을 당하여 죽게 된다. 그런 그가 옥에 있을 당시, 메시아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줄 그런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강력한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1:6)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당시 식민통치를 펼치고 있는 로마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옥에 갇힌 세례요한 역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끌 왕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예슈아께서 요한을 언급하신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11:7~9)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중략)...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의 부분을 보면, 요한의 의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메시아에 관하여 궁금해 하던 요한에게 주신 예슈아의 답변은 이사야의 글(61장)이 전부일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이처럼 세례요한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랬던 자였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말로 그 회복의 시작을 알렸던 자였다. 그런 그가 바랬던 것은 옥중에 갇힌 유대인의 해방이었는데, 이는 세례요한이 오해를 했기 때문에 가진 것으로 지극히 살고자 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그랬더라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인정했던 예슈아조차도 헛소리를 하신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례요한은 메시아가 와서 행하실 그 일을 정확히 말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례요한이 의도했던 그 일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그 일은 바로 강도로 알려진 애국자 바라바가 예슈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그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


하지만 바라바의 모습은 구원받을 만한 자의 가치가 어떠한 지를 명백하게 잘 보여준다. 그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압제자 또는 세상의 권세잡이 입장에서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우선시 죽여야 할 그런 존재인데도, 예슈아는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죽임당해야 하는 그 역할을 바라바에서 예슈아로 옮겨오신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과 종교 지도자들이 쓰임을 받았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죽어야 할 반란의 주동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슈아의 행하심은 이처럼 모든 것이 이미 예언된 그 사실들을 이루시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언들을 유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예언들이 언제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뿐, 그 내용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다.


강도로 알려진 애국자 바라바가 예슈아와 맞교환되어, 구원을 얻게 되는 일은 그의 운발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이름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더불어 그 이름을 그가 갖게 된 이유조차도 이미 철저하게 계획되었던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주님의 역사하심은 이렇다.

한 두 가지만 충족되었다고 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건에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요소들에서 모든 조건들이 충족될 때, 그때 비로서 주님의 계획이 성취되게 된다. 따라서 그 모든 요소들을 발견할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세례요한처럼) 짐작은 할 수 있겠으나, 그 일이 성취되는 정확한 때와 시는 알기 어렵다는 게 이해가 된다.


단순한 강도인줄로만 알았었는데, 주님의 계획을 위해 준비되었던 '야훼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이름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나눠볼 수 있었다. 여러분과 제게도 그런 복된 이름이 준비되어 있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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