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의 묘책
문왕과 세월을 낚고 있던 강태공이 만나던 당시의 대화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문왕은 위수에서 띠풀을 깔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그 노인은 괴이하게도 미끼가 없는 곧은 낚시를 수면 위에 석자가량 떨어진 허공에 드리운 채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현인으로 직감한 문왕이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며 물었다.
문왕 “낚시를 즐기시는가 봅니다.”
태공망(강태공)이 대답하였다.
태공망 “소인은 자기의 일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하고[소인락득기사(小人樂得其事)], 군자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한다[군자락득기지(君子樂得其志)]고 들었습니다.”
태공망 “지금 제가 낚시를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문왕이 물었다.
문왕 “이와 비슷하다는 말은 무슨 뜻 입니까?”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태공망 “낚시에는 세가지 모책이 있습니다.”
태공망 “후한 녹봉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모책과 많은 상을 내려 병사들이 목숨을 바치게 하는 모책과 벼슬을 주어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모책입니다.”
태공망 “대저 낚시라는 것은 이것을 구하여 얻는 것인지라 그 담긴 뜻이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가히 커다란 이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왕 “거기에 담긴 깊은 이치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태공망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뚜렷하면 작은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약간 굵고 미끼가 향기로우면 중치의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면 큰 물고기가 물게 마련입니다.”
태공망 “물고기는 미끼를 물고 낚시 줄에 낚이고, 인재는 봉록을 받아먹고 군주에게 복종합니다.”
태공망 “그러므로 미끼를 드리우면 물고기를 낚아서 쓸 수 있고, 봉록을 내걸면 훌륭한 인재를 얻어서 능력을 쓸 수 있는 것 입니다.”
출처) blog.daum.net/godoin/14739774
| 예슈아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셨던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의지적인 발언을 하셨는지 평소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가 문왕과 강태공의 대화 속에서 찾아지는 것같다.
예슈아는 '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마5:17)이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사람을 낚는 그 어업의 형태와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형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두 구절 모두 예슈아의 강한 의지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무엇인지, 예슈아께서 쉽고 명료하게 말씀하신 그 대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율법을 설명하신 대목이다. 그리고 그 율법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어떤 행동이 먼저일까? 이를 구분하기 위해 참조 가능한 성경 말씀을 인용해 보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너무나 유명한 성경 말씀이다. 율법의 본 의미는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그 행동방식을 알려주셨으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간할 수 있겠다. 어떤 행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복을 받을 수 있는지 또는 어떤 행동이 선행되어야 저주를 받게 되는지를. 곧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빌어'주는 행동을 하는 자에게 (야훼께서) 복을 주신다. 이는 신앙을 신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반드시 깨달아져야 할 바라 할 것이다.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만, 당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거나 생각하시는 경우들이 많다. 왜냐면 나조차도 가난하고 힘들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섬기고 배려하는 등의 헌신 등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 조차도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유명한 창12:3의 말씀을 보라.
그 말씀은 복을 먼저 받는다는 명시가 전혀 없다. 대신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말씀하셨다. 가장 먼저 조건이 충족될 때,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들에 한해서 복을 주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의지가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이 대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단 하나의 말로써 이해의 폭을 대폭 줄일 수 있으리라 본다.
| '마음의 할례'다.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마음의 중심이 강건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이처럼 강건해질 수 있는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는 예레미야의 글이나 에스겔의 글(겔36:25~27)에 잘 나와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6)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다. 그 마음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야훼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들을 능히 지켜행할 수 있게 하시겠다(겔36:27)고 하셨다. 그렇기에 '야훼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마음'을 영접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할례'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온전케 하려는 마음을 은혜로 받게 된 뒤, 우리의 행동이 시작된다. 율법을 온전하게 하는 행동이 시작된다. 이는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내가 받고자 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나의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것'
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 수준은 어디까지 일까요?'라고 스스로 질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 수준은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리 만큼 자세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너가 받고자 하는 수준만큼'
이라고. 어떤가. 이보다 더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어디에 있을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있고, 그렇기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상황들이 늘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런 중에 각종 설교나 신앙 프로그램 등은 신앙인의 자세를 정량적으로 구체화 시켜주겠다며 우리들에게 제시하곤 한다. 하루에 성경 10 장을 읽고, 하루 세 번을 나누어 각 30분 씩 기도하라는 등의 구체화 된 내용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조차도 각기 다른 삶을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들이 잘 안다. 그래서 설교 이후에 성도들 간의 교제시간을 만들어서 '설교 내용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권장하고 있다. 설교자가 제시한 그 구체적인 안건을 삶이 다른 각자의 일상에 적용 가능한지 아닌지 분별하거나 강한 독려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소위 작심 3일로 끝나고 만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푸념섞인 말을 내뱉으면서, 자신의 모습에 낙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왜 일까? 그것은 삶의 다양함에 맞는 제안을 주지 못해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을 매우 중시한다. 그 사실은 옳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적용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수정하고 보완하는 등의 다듬는 과정이 들어가야만 한다. 인간은 어느 만큼 다듬어야 하는지 그 수준을 알지 못한다.
"목사님이 이 만큼 했으니, 장로로서 또는 집사로서 나는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면서 목사님이 제시한 제안을 나름대로 수정하여 실행에 옮기는 노력도 하는데, 그 경우도 실패하고 만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에게 맞는 정확한 수준 내지는 자신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는 조건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수준을 수용해야 할까?
앞서 언급했듯, 너무나 단순하다. 그리고 명료하다.
'내가 받고자 하는 만큼' 행하면 된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한 목사님이 어떤 교회에 강사로서 초빙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강연을 마친 후 교회에서 강사료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더란다. 그때 강사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목사님께서 다른 교회에 강사로 가셨을 때, 받고 싶어하시는 그 금액 만큼을 주십시오"
어찌보면 매우 추상적인 답변일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 명확한 답변 또한 있겠는가?
강사 목사님의 답변을 듣자 마자 곧바로 '정확한 금액'이 강사료로 책정되었다고 한다.
이것이다.
'내가 이웃을 어느 수준까지 사랑할까요?'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당신의 이웃으로부터 당신이 사랑받고 싶은 수준 만큼만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하면 어떨까?
이것은 문왕과 강태공의 대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물론 성경만큼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을 안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조차 깨닫지 못하는 바를 말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낚시에 담긴 묘책을 깨달은 강태공은 은나라의 주왕을 무너트리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
문왕과 강태공의 대화 가운데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을 읽은 우리들이라면 익히 알 수 있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런데 강태공은 그 깨달음을 직접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옮긴 자였다는 것을 역사는 말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강한 도전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그 사실이 실제 생활에서 내 삶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은 이내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삶에서 나타나게 된다면, 그는 세상을 능히 바꿀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태공이 말하는 율법의 그 내용은 사실 경제학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었다.
'선보급 후수익'이라는 사업 모델로 경제학에서 가장 강력한 사업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경제학적인 표현을 일상의 속담으로 바꿔 말하자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너무나도 쉬운 말로 이 사실을 바꿀 수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교회를 다녀 본 바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 정도는 누구나 다 들어보았고 익히 아는 말이다. 그 속담은 성경에 기록된 표현이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율법(마7:12)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그렇기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어느 누가 '나는 율법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 되었든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공통된 사실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 본 자는 이처럼 누구든지 야훼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된다는 것을 그렇기에 인정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낚시에 담긴 묘책은 경제적으로 최고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 모델로서, 그리고 옛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속담으로도 우리와 늘 함께 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한다.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라면, 오늘의 삶 속에서 우리는 능히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럴 때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삶을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거 아닐까?
'몇 개의 율법 조항을 지켰느냐'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삶에서 내가 바라는 수준만큼 이웃을 사랑했느냐'는 부분에 관심을 둘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