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을 청소하던 두 사람 중 어느 누가 세수를 하게 될까요?
| 한 젊은이가 유태인에 대하여 연구하려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구약성서를 공부하고, 이어 유태인에 관한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유태인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유태인을 이해하려면 유태인의 생활 규범인 탈무드를 공부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어느날 유태교의 승려인 랍비를 찾아갔다. 랍비란 유태인에게는 스승이고,재판관이기도 하며,때로는 어버이가 되기도하는 매우 존경받는 존재이다. 랍비는 자기를 찾아온 젊은이게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해 보겠다는 결심을 세운 모양이지만 아직 탈무드를 앞에 펼쳐 놓을 자격조차 없는 듯하오' 라는 말로 단정지어 말하였다. 하지만 젊은이는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젊은이 " 그렇다면 저한테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시험해 보고 결정해 주십시오."
젊은이의 간곡한 부탁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랍비 "두 아이들이 집에서 굴뚝 청소를 하게 되었소.그런데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히고 내려 왔는데,다른 아이는 얼굴이 말끔한 채 굴뚝에서 내려 왔소. 이 두 아이 중 누가 얼굴을 닦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너무 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젊은이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겠죠."
젊은이의 대답을 예상이나 한 듯 랍비는 냉정하게 말하였다.
여기서 잠깐!
자신이 배움을 얻고자 하는 학자에게서 질문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까?
답변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답변을 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부터 고민해 보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다. 내가 인정하는 학자가 내게 질문했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자는 뜻이다. 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학식과 경륜이 있는 학자에게서 질문을 받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런 학자가 내게 제시하는 문제라면 그 문제 역시 '학식과 경륜이 겸비된 문제'라고 인식해야 옳을 것이다. 이같은 인식이 전제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답변을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으로 삼기를 바라는 이에게서 질문을 받았다는 그 사실은 출제된 문제 자체도 그만한 깊이의 경륜을 구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쉽사리 답을 제시하려 하는 그 태도는 결국 문제를 제시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더 정확하게는 탈무드가 제시하는 물음에 쉽사리 답하려는 이는 지난 1,000년 간의 오랜 시간을 통해 탈무드를 저술했던 많은 유대 랍비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그 안에 숨겨진 심오한 의미에 대해 가벼운 답변을 제시하는 것 만으로 우리 삶에 필요한 충분한 이해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그 모습 역시 성경을 주신 야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치는 가깝게는 탈무드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으로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교훈이라 생각한다.
랍비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소."
젊은이 "랍비님,그렇다면 맞는 말이 무엇입니까?"
랍비 "만일 당신이 탈무드를 공부하게 되면, 그 물음에 지혜로운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이오."
랍비는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랍비 "두 아이들이 굴뚝 청소를 마치고 지붕에서 내려 왔소 그런데 한 아이는 말끔한 얼굴이었고, 또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을 묻히고 있었소,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검은 아이를 보고는 '내 얼굴도 검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얼굴이 검어진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를 보고 내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이때 젊은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젊은이 "이제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랍비는 웃음을 띠면서 앞서와 같은 내용을 다시 물었다.
랍비 "두 아이들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워졌는데,과연 어느 아이가 얼굴을 닦는다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젊은이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닦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이번에도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하였다.
랍비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소이다."
젊은이는 너무도 낙심하여 지친 표정이 되었습니다.
젊은이 "랍비님,도대체 탈무드에서는 어떤 대답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는 깨끗하고 한 아이는 더러워질 수가 있겠소? 두 아이가 다 얼굴이 더러워졌을 테니 둘다 씻을 것이오."
여기서 잠깐!
랍비의 질문은 일괄된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탈무드가 우리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또다른 의미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한 번의 수고를 통해 얻은 결과'를 그 다음부터는 수고하지 않고 사용하기를 원한다. 이를 대변하는 삶의 모습이 주물이나 형틀 등을 만들어 제품을 찍어내는 산업구조와 같다. 주물이나 형틀 등을 만들기까지 온갖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주물과 형틀이 만들어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저 찍어내면 된다.
하지만 탈무드가 의도하는 것은 그와 다르다. 매순간 쥐어짜듯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을 갖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모습'이 표현을 달리하면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 역시 자신의 숱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존 스튜어트 밀 역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탈무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사고하는 순간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성경 속에 숨겨진 깊은 진리에 다가가기를 바란다면 그 역시 '고정된 답'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답은 매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문제를 주시는 그 분과 동행한다는 그 자체에 삶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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