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성경을 비웃는 이유. 일만 달란트의 빚은 얼마쯤 될까?





성경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온다. 그리고 그 빚은 우리가 평생을 다 바쳐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고 설교한다. 그런 중에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금액이라는 의미로서, 일만 달란트를 오늘 날의 화폐로 환산하곤 한다.


| 그 금액이 얼마쯤 될까?

필자는 한 설교에서 일만 달란트가 오늘 날의 약 4조원 가량 되는 막대한 돈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본인에게는 정말 평생을 다 투자한다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려운 금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일만 달란트를 약 4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비유했던 것같다.

그런데 말이다.
'빌 게이츠가 이 설교를 듣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좋은 자료들이 많았다. 그래서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잘 정리된 자료에 의하면,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금으로 환산하자면 약 20kg~40kg으로 지역에 따라 다소 편차가 심하게 난다고 한다. 본 글에서는 가급적 비싸다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1달란트는 금 40kg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려 한다.

한국 금거래소에 제시된 구매금액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1돈(3.75g) 기준으로 256,500원이라 한다. 그럼 40kg일 때는 비례식 
3.75g : 256,500원 = 40kg : x
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40kg에 2,736,000,000원이 나온다.

'1달란트 = 40kg = 2,736,000,000원(약 27.4억원)'이기 때문에 1만 달란트는 약 27.4억원의 일만 배를 하면 된다. 그 10,000배는 27.4조원에 해당한다. 그저 억 소리 나는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9년 8월 17일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빌 게이츠의 순 자산규모는 1천60억 달러(한화 126조원)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금액은 서열 2위라는 게 더 대단한 사실이다. 아마존 최고경영자인 제프 베이조스는 1천130억 달러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설교를 듣게 된다면, 무엇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설교자 당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겠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는군요!'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성경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그 크기'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일만 달란트'는 사실 '인간으로서는 계수할 수 없는 숫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숫자이긴 하지만 숫자가 아닌 숫자를 뜻한다.

에베소서 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이 있다. 영은 존재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간주된)다. 철학적 의미에서 점(dot)이란 '위치는 있지만, 그 크기가 없다'고 '설명'(definition)한다.




물 속에 소금을 넣어서 녹였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에게

'이 물 안에 소금이 있을까 없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이 안에 소금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 합당한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상황을 '논쟁한다'라고 말한다.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끝이나지 않는 논쟁이 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라는 질문이다. 그 이유 또한 동일하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사실은 오직 창조주이신 야훼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야기다. 왜냐면 그분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와 악수를 하고 싶다면, 그 또한 그림자여야 한다. 물리적인 존재는 그림자와 어떠한 연관성도 가질 수 없다.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일만 달란트의 '일만'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The women sang as they played, and said, "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 his ten thousands."(NASB)

우리는 사울 왕을 비하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 반대다.

'천'(thousand)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eleph(אֶלֶף)는 'thousand, million, family'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만'(ten thousand)을 뜻하는 히브리어 rebabah(רְבָבָה)는 'myriad, numerous, ten thousand, ten thousands'의 뜻을 갖는다. 이 의미를 풀어 보면 'myriad'(무수한) 또는 'numerous'(많은) 등으로 이는 인간으로서는 계수할 수 없는 수준을 일컫는 표현이다.

  •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7)


야훼 하나님의 축복 또는 언약이 완성될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다시 말하자면 '일만'의 수준이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기에 이를 가리켜 '무한'(infinite)이라고 말한다. 사실 무한이라는 말은 수(number)를 일컫는 말이다. 왜냐면 모든 것은 1이라는 숫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행1:7)

그래서 예슈아는 시작의 끝을 지칭하는 '그 때와 그 시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아는 이들은 그래서 그 영역을 '무한'이라 부르면서, 

이 무한을 정의하길

  • 무한 + 무한 = 무한,
  • 무한 + 1 = 무한,
  • 무한 - 1,000,000,000,000 = 무한

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한에는 무엇을 더하거나 빼더라도 변하지 않는 '신실함'이 영원하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의 거룩에 변화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야훼 하나님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겠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그 노력의 하나가 다름아닌 '제논의 역설'이다. 2의 제곱근에 관한 이야기로서, 2의 제곱근은 실존하는 길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 길이를 재어 보겠다는 게 제논의 역설이다. 물론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로 빗대어 있지만.




설교자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야훼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 크기와 길이와 너비와 높이를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설교자 자신의 앎의 폭'을 조금만 더 넓힐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함께 나눠보길 원한다. 누군가에게는 도달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과연 야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크기다고 말한다면 이건 야훼 하나님을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여기는 것이지 않겠느냐 하는 염려에서 나누는 말이다. 

소위 은혜를 반드시 눈에 보이는 사실 또는 인간이 설명 가능한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겠다는 강박관념을 지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는 그저 은혜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주시는 이가 주실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게 은혜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빌 게이츠처럼 셀 수 없을 만큼의 돈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는 게 은혜이고, 서울 역 앞 광장의 노숙자일지라도 그 심령이 야훼 하나님 앞에 도달하면 능히 받을 수 있는 게 은혜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은 일만 달란트의 실질적인 의미를 나누는 부분에서 내용을 담아 보았다. 성경의 이해와 해석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할 경우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결국에는 왜곡될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성경을 주신 이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하리라고 권하고 싶다.

시인의 글을 독자의 의중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시인의 의중에 따라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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