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1번째 예슈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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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어떤 상황을 나눠 보자.


한 예언 사역을 하시는 이, 곧 예언자가 교회(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교회(공동체) 안의 지체들 각각을 상대로 예언 사역을 하셨다. 사역이 끝나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그곳의 성도들 각각은 자신이 받은 예언의 내용들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언자가 해 준 내용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가운데 한 성도는 특이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저는 예언자의 내용 그대로를 믿기 보다는, 예언을 주신 이에게 나아가 '예언자를 통해 제게 주신 그 예언의 상세한 설명'을 들려 달라고 합니다."
"가령 '당신은 앞으로 커피를 마시지 마십시오'라는 예언을 들었다면, 제가 왜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지, 그 상황의 배경을 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었던 히스기야 왕이 야훼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고, 그 결과 선지자의 예언 내용과 다른 결과를 이끌어 냈던 것처럼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신이 히스기야 왕입니까?"

라는 다소 격양된 듯한 비난이 쏟어졌다. 소위 예언 사역에 대해서 나름 인정을 받는 예언자의 예언인데, 그 예언을 들은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야 함이 옳을 것인데, 그러한 기대와 다르게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간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긴장감과 짙은 냉기로 가득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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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번은 

"저는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예로써 성경 일독같은 좋은 권면이 있을 경우, 제 삶에 일독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를 기도를 통해 판단합니다."
"그래서 설교자 분은 일년에 성경 일독을 권하셨을 지라도, 제가 따로 기도하는 중에 야훼 하나님께서 제게 들려주는 내용이 있다면 저는 일독을 하던지 혹은 4독을 하던지 아니면 성경을 읽기 보다는 삶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지 등을 결정합니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말이 끝나자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읽으라고 설교자가 권면을 하면 그냥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설교자는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그 성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이미 율법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행위를 했던 이들이 자신들도 유월절을 지키고 싶다고 간청하자 모세는 야훼 하나님께 이 사실을 물어 보았잖습니까?"
"그러자 유월절이 지난 한 달 후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는 야훼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던 내용처럼,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당신이 모세입니까?"

라는 매서운 비난이 그 성도에게 쏟아졌다.

두 가지의 사례를 나눠보았는데, 여러분들이 위의 설교자 또는 목회자 였더라면 어땠을 까요? 또는 여러분들이 위의 그 성도였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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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심하게 저는 환자와 건강한 보호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삼아 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보호자가 환자와 함께 길을 걷는 찻길 반대편에 커피숍이 있었습니다. 보호자는 환자에게

"우리 저곳에서 잠시 쉬면서 커피 한 잔 마시다 갈까?"

라고 말하면서 무단으로 찻길을 휭~하니 건너서 커피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심하게 다리를 저는 환자의 입장에서 그 보호자는 너무나 쉽고 빠르게 길을 건널 수 있었지만, 환자인 자신은 그렇게 건너는게 불가능합니다. 왕복 2차선밖에 되지 않는 길이지만,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그것도 차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단으로 차도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렵사리 건너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 보호자는

"나는 당신이 쉽게 건널 수 있을 줄로만 알고 무단으로 차도를 건너자고 제안했던 것인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래서 지극히 쉽고도 쉬운 일이지만, 몸이 불편한 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름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권면하는 건강한 자의 제안에 대해 몸이 불편한 이는 액면 그대로 순종해야 함이 옳을까요? 건강한 자의 호의가 있겠지만, 그 호의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액면 그대로 따라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몸이 불편한 수준에 따라 또는 성경 속 표현을 빌어 쓰자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르게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 건강한 자가 제안하는 그 제안은

건강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자를 배려하기 위해 건강한 자가 고안해 낸 계획이기 때문에 당연히 몸이 불편한 자의 사정에 따라 유도리 있게 바뀌는게 옳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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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께서 신(God)의 입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매질과 못질이 어떻게 신에게 고통으로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마법과 같은 것을 부리면, 어떠한 고통이나 아픔도 느끼지 않은 채로 십자가 형벌을 손쉽게 감당할 수 있는데 말이죠. 심지어 그 고난의 일을 즐기기라도 하듯 유머러스한 미소까지도 지어보일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너희도 십자가를 감당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명령을 했다고 합시다. 그 명령을 손쉽게 따를 수 있는 이가 과연 몇 이나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신이었기에, 고통도 느끼지 않으면서 손쉽게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신이 아닌 인간은 달라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신은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가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며 오히려 예슈아를 비난하려 들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을 강조하던 예슈아가 매우 멋쩍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신이 지키는 내용이 아니고 인간이 지켜 나가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신의 입장이 아닌 오로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성경이 바라는 삶을 직접 살아 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5:17)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8~9)

성정이 같다는 말은 같은 부류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불한당이면 설교를 전하는 이도 불한당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국말을 사용한다면, 설교자 또한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영어로 말하면서 한국말 밖에 알아 듣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간단한 것도 이해를 못하십니까?"라고 핀잔을 둘 수 있겠습니까? 영어로 말하는 설교는 반드시 들을 수 있는 자의 수준, 곧 듣는 자의 언어로 수정 또는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설교가 이해가 될 수 있겠으니, 설교 내용이 듣는 자의 삶을 바꾸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를 번역하지 못한다면, 평생을 들어도 성도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겠지요. 변화 자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 자 또는 예언을 하는 자와 그 예언을 듣는 자는 차이가 없어야 하면서도 명백한 차이를 가져야 합니다. 말하는 자는 듣는 자의 수준에 맞는 또는 눈높이를 맞추어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하는 자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죠. 사정이 다른 만큼 설교 내용 또는 예언이 적용되어야 할 수준도 달라져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많이 가진 자에겐 많은 수익을, 그리고 적게 가진 자에겐 적은 수익을 요구하시는 공평하신 그분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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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01번째 예슈아가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처럼 예슈아의 행동을 따라했다고 해서, 내가 예슈아라 평가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행합니다. 모방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처럼(like father)행동합니다. 흡사 국화빵처럼 행동거지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향해 "너는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혹은 아들의 행동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 너가 너의 아버지라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조롱하는 이 또한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서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슈아를 닮은 분이신가요? 아니면 여러분도 모르고 여러분의 조상도 모르는 그 어떤 이를 닮은 분이신가요? 자녀는 그 부모를 반드시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부모의 모습 그대로 행하는 것이 자녀 됨의 이치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슈아처럼 행동하시길 원하시나요?

아니면 여러분의 담임 목회자 분처럼 행동하길 원하시나요?

목수가 톱을 이용해서 동일한 크기의 나무조각을 자르려 합니다.

먼저 A 부분을 자로 재서 자릅니다. 그리고 편리상 A를 기준 삼아 원목에 그대로 대고 B를 자릅니다. 이후 B를 기준 삼아 원목에 대고 C를 자릅니다. 이후 C를 기준 삼아 원목에 대고 D를 자릅니다.

다 자른 후 목수가 4개의 나무 조각의 크기를 비교해 보려 합니다.

A = B = C = D일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A와 B는 크기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겠으나, D는 A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매 순간 자신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닮아야 할 기준은 오직 예슈아인데, 예슈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자리에 목회자 또는 어떤 은사자가 오면 나도 모르게 나는 사람을 닮은 자가 됩니다.

현명한 목수는 처음에 자른 A를 매 순간 기준으로 삼습니다. 
A를 기준 삼아 B를 자르고, A를 기준 삼아 C를 자르며, A를 기준 삼아 D를 자릅니다. 그리고 각각의 길이를 비교해 보면 자연스럽게 A = B = C = D가 됩니다.



여러분.

| 우리는 101번째 예슈아가 아닙니다.

하지만 예슈아를 부모로 삼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슈아를 닮은 자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예슈아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 I'm not Yeshuah(Jesus).
  • But I'm like Yeshuah(Jesus)




할 수만 있다면 내 삶의 모든 것은 그 기준이 예슈아입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그래서 2천년 전에 예슈아의 행하셨던 그 모습들을 지금의 내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이런 이유 때문에 예슈아를 모르는 이들은 나를 통해 예슈아의 모습을 오늘 이 순간에도 볼 수 있어서, 예슈아는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예슈아를 증거하는 것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예슈아의 행하심을 보여주는 증인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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