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 의외의 질문을 해 보자.

Drive Thru History


산상수훈에 대해 설교자 분들이 설교하기를

"구약에 거론된 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적으로 완성도를 꾀할 수 있는 구약의 계명들'에 비해 산상수훈의 기준은 '마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

  • 심령이 가난한 자...
  • 애통하는 자...
  • 온유한 자...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긍휼히 여기는 자...
  • 마음이 청결한 자...
  • 화평하게 하는 자...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예슈아께서는 왜 마음의 중심 부분에 해당하는 심오한 속성들을 언급하셨을까? 겉으로 행하는 부분조차도 제대로 지켜 행하기 힘들건만,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을 기본(default)으로 삼으시겠다는게 너무 격한 기준이지 않을까?

사61장.(개역개정)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pixabay


이사야의 편지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가난한 자'가 언급되어 있고, '포로된 자' 그리고 '마음이 상한 자' 등등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이 중에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를 보면 그들은 외관상 훤히 보이는 이들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써 실제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시는 것이고, 포로된 자에게 석방의 기회를 베풀어주시는 것이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faith)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고난을 담대히 극복할 수 있는 믿음(faith)을 더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행4장(개역개정)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즉 외형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기도에 대해선 울며 메달리듯 기도하는데 반해, 자신의 내면을 바꿔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내 눈에 보이는 삶의 문제점은 겨우 '티'의 수준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문제점은 '들보'만큼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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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의 수준은 가루(dust)수준이다. 반면 '들보'란 소위 대들보를 일컫는 말이다. 그 크기를 보면 비교 불가다. 그런데 우리는 비교 불가의 상태에서 매우 매우 하찮은 것에 집중해 있다. 현 상황에서 티끌 수준의 것이 바뀐다 한들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일말의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없는 영향력없는 삶의 요소에 집착해 있다. 그리고 그 요소가 바뀌기를 바라면서 애원하듯 기도한다.


하지만 비교 불가 수준의 대들보(the beam)가 바뀐다면 어떨까? 대들보가 바뀐다는 것은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house)의 모양과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엄청난 삶의 변화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삶의 실질적인 변화를 영향력 있게 이끌어 내고 싶다면, 티끌에 집착하지 말고 반드시 대들보(the beam)를 바꿔야 함이 옳다.

그런데 티끌은 내 몸 밖의 공간에 있고 대들보는 내 몸 안에 있다.

여러분.
여러분이 티끌과 대들보 중에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것을 바꾸는게 제대로된 효과라 할 수 있겠는가?

삶에 어떠한 변화도 안겨주지 못하는 티끌보다는 집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수 있는 대들보를 바꾸는게...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야훼 하나님은 지혜로운 생각을 하실 수 밖에 없기에, 당연히 우리들 삶의 외형적인 요소를 겨냥하기 보다는 우리 삶의 내면을 공략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바꾸는 일이다.

마음의 중심이 바뀌지 않은 자는

'재산이 없다'는 자체로 비굴한 삶을 살아간다.

허나 마음의 중심에 박혀 있던 대들보가 빠져나가서 새로운 집(성전)을 심령에 짓게 된 자는 '재산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개의치 않는다. 그의 시선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한 자들이 '예슈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너의 모든 재산을 약탈해 갈 것이다."고 협박을 할지라도 능히 그 협박을 이겨내고 예슈아의 이름을 지키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악한 자들조차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삶의 요소들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예슈아를 아는 것이 참 기쁨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간증들을 들어보면 대부분

'거지였던 자가 부자가 되었다'
는 식의 간증보다는, 

'가난했던 제가 이제는 (가난하지만) 남을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부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는 마음의 변화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에 부자가 아닐지라도, 건강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능히 건강하지 않은 이를 위로할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 가난한 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는 신령한 부유함이 있다. 그건 내 손에 재산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내 마음에 부유한 집이 이미 세워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성전'이 먼저 세워져야 한다.
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안의 대들보가 변하여 신령한 대들보로 바뀔 때 세워지는 신령한 집이 건축되어야만 한다. 그 집을 마음의 중심에 가진 이들은 믿음(faith not believe)을 소유한 자다.

  •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faith)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 그러므로 '믿음'(faith)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우리에게 믿음(believe)이 없다는 것을 질책하시는게 아니다. 마음의 할례 곧 내 안의 대들보가 신령한 대들보로 바뀐 자 만이 소유하는 '성전'(faith)을 소유하지 못하였음을 질책하시는 말씀이다.


마5:23~24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드리는 행위에 예배의 중심이 있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에 '성전'(faith)이 세워져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시는 예슈아의 설교가 바로 산상수훈이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 왔나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 이해되시나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 크기가 겨우 티끌 수준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곧 우리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해결되지 못한 죄성'(대들보)은 눈에 보이는 요소와 비교 불가입니다. 너무 크기 때문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대들보가 빠지고, 신령한 대들보를 받아서 새로운 집을 지어 보십시오.
내가 기대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한 변화가 우리의 삶 속에 실질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a)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 이러한 간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내 안의 대들보를 제거하기 위해 내 삶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내 삶에 기회는 평생 3번 정도 찾아온다고들 말합니다.

오늘 내게 임한 고난이 바로 이 3번의 기회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단순히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대들보를 갈아치워 버리는 그런 당당한 야훼 하나님의 군사(soldier)가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대들보가 빠지지 않으면 죄의 집이 되고 
대들보가 빠지(고 신령한 것으로 바뀌)면 성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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