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종교통합은 어떤 종교로 이루어질까?
마지막 시대로 향하여 가는 길목에서 신세계 정부는 하나의 종교로 통합을 이루려 한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자신의 신격화 단계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부분까지 자신의 통치 아래에 둔다. 북한의 독재체제와 그들의 신격화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세계를 하나의 권력 아래에 두겠다는 포부는 그 자체로 모든 시민들에게 하나의 종교만을 허락하겠다는 의지적 표현과도 같다. 그래서 신세계 정부의 행보가 나날이 빨라지는 것을 묵도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종교"에 의해 종교통합이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오늘은 종교통합을 이루는 마지막 종교는 어떤 종교일지에 대해 함께 나눠보길 원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어제의 아침이 오늘의 아침에 다시 찾아오고, 내일의 아침에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사에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이것을 평행이론이라고 한다.
이는 '도플갱어'의 또다른 표현처럼 여겨지는데, 동일한 삶을 가진 사람이 각기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다.
프라임경제 |
yes24's blog |
역사의 반복성은 비단 영화의 소재로만 활용되는 그런 시시콜콜한 속성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일어난다. 아버지 세대의 모습들이 자녀 세대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부모 세대의 잘못된 선택이 자녀 세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들은 역사의 반복성을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경우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는 반복된다 또는 평행이론'이라는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역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종교통합을 앞서서 '미리보기'할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 종교통합 미리보기
한 국가가 또는 대륙이 하나의 종교로 통합을 이루던 때가 과거에 있었을까?
중세시대의 역사를 훓어 보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물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Reformation; New World
ABC |
루터와 아울러 장 칼빈의 종교개혁은 실로 독보적이라 할 만큼 국가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부패한 천주교의 개혁에만 그치지 않았다.
역사는 물론 문화와 문명 등에서 패러다임 전부가 뒤바꿔 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교황청의 제국주의적 통제'(신탁통치)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적 사회로서의) 독립을 얻었다. 문화의 경우 르네상스 운동의 인문주의와 더불어 활동했는데, 이들은 신앙 안에서 주제를 택하던 기존의 활동에서 떠나 인간과 이성(인간의 자유의지)을 중심으로 삼았다. 사회적 기술분야에서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다.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판단의 주체가 되는 합리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신앙(교황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주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높게 평가하게 한 좋은 '정신운동'이 원동력이 되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운동이 바로 '르네상스'다.
therenaissancetimes.com |
르네상스(문예부흥 or 학예부흥)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출처: wikipedia)
즉 '신의 입장 또는 신의 뜻'은 사라지고 '인간의 입장 또는 인간의 뜻'만이 그 땅을 덮게 된 계기가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이다.
※ '신의 입장 또는 신의 뜻'이라는 표현을 천주교의 뜻(의지)이라고 말하는 건 결단코 아니다. 다만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큰 틀 안에서 이동된 두 영역을 나누어 설명했을 뿐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기독교의 신앙이 보편화 되었고, 이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겐 너할 나위없는 자유함을 선사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을 지켰고, 기독교식의 믿음을 소유하는 이들에게는 당당하게 그리고 합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로써 '반기독교적 행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절대적인 시기가 열렸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의 탄압은 사라지고 자유가 찾아 왔다. 하지만 반대로 기독교에 의해서 탄압이 더욱 거세진 이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예슈아"(예수; Jesus)의 이름으로 합당하게 자행되는 탄압이 더욱 증가한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탄압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 그들은 유대인(Jew)이었다.
Yad Vashem |
☞ 루터와 반유대주의 "유대인의 사지를 찢어라"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양심도 울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들이 "예슈아"(예수)의 이름으로 탄압을 정당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합리적으로 그리고 신앙에 입각해서 유대인을 탄압할 수 있는 시대가 있을까?
이 시대에 자신의 기독교 신앙관과 어긋남을 느낄 수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마24장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한다"는 부분을 주시해서 보아야 하리라.
이슬람교가 이같이 '야훼께서 택하신 이'를 미혹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교가 미혹할 수 있겠는가? 야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이들, 곧 믿는 이방인(Gentiles)을 속일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이겠는가? 그것은 마24:23~24의 구절처럼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출처를 외칠 수 있는 종교'여야만 한다. 그런 종교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야훼의) 선지자들이 일어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예슈아(예수)의 이름'으로 '야훼께서 택하신 이들'을 양심에 꺼리낌없이 당당하게 속이려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야훼께서 택하신 이들' 곧 (믿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향해 온갖 악한 행동을 '예슈아(예수)의 이름'으로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 중세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래서 장차 올 그날을 우리는 이미 '미리보기'하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우리의 신앙은 종교가 아니다. '삶'이다.
Not religious ceremony,
but The life
생활의 변화를 일궈내고, 그렇게 변화된 삶을 통해 예슈아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게 우리들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삶이라는 틀을 떠나서, 종교라는 제한된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흐름이 믿음의 지체들 안에서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개역개정)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 사도 바울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보라.
"율법의 행위" 또는 "종교적 의식"에 집중하는 무리들이다. 그런 무리에게 꾀임을 당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한탄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여러분.
| 오늘 이 순간부터라도 '종교적 의식 행위'에서 벗어나십시오.
교회(공동체)에서 진행되는 예배 시간을 지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둔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슈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면, 예슈아가 이 땅에 오신 그 본질을 기억하십시오. 교회(공동체) 건물 안에서 자기들 만의 축제에 취하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기 보다는, 소외되고 추위에 떨며 배고파 하는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는 일에 더 힘을 써 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교회의 건물을 과감하게 벗어나시길 강권합니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지극히 폐쇠적인 교회의 건물을 벗어나면, 우리의 아무리 미약하고 나약하지라도 우리의 그런 작은 도움조차도 간절히 원하는 이들이 지천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게 아픈 이웃들을 치유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십시오"
"내게 가난한 이웃들을 베풀 수 있도록 재정을 더 부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건물을 벗어나면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단 돈 1천원이 부족하여 먹을 것을 제대로 사먹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시대입니까?
베네수엘라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재정 위기가 아닐지라도, IMF 금융 위기를 두 번이나 지나면서 우리 주변에는 놀랍도록 늘어난 노숙자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냄새가 나기 때문에 가까이 가기 싫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 옆에 가면 더러움이 묻을까봐 겁이 나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여 돌아간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렇게 말하려는 우리들에게 강한 채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Good Samaritan Clinic |
어찌보면 의외로 우리들 신앙 가운데 '종교적 의식에 일괄하는 종교통합'들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종교적 의식'(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십시오. 그같은 종교를 가르치는 교회(공동체)에서 속히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예슈아의 이름을 위하여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종교관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의 옷을 입고서 Torah를 믿는 유대인의 무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있는 자 만이 유대인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분들이 신세계 정부가 이룩하는 종교통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에 속하는 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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