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좋은 배우자와 살고 싶은 욕망...

신앙인을 자청하는 우리들.

부부의 인연을 신앙 안에서 맺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더욱 튼튼한 신앙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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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런 로망을 꿈꾸며 신앙 안에서의 결혼 생활을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 결혼 생활은 로망이 아니다. 전투다.


우리는 상대 배우자를 바라볼 때, 

"저 사람이 조금만 더 신앙의 성숙을 이룬다면 좋겠다"
는 생각을 품는다. 아마도 '십중 팔구'(80~90%)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 배우자의 신앙에 좋을 법한 (삶의) 보약들을 찾아 헤맨다. 누군가 '이거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효과가 있어'라는 말만 하면, 서적이든 집회든 또는 안수기도가 되었든 그 순간부터 그것들은 (삶의) 보약이 된다. 보약을 확신한 그는 기필코 자신의 배우자에게 복용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만에 하나 배우자가 복용하기를 거부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적으로 복용시키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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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가정에는 '종교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bellum sacrum)이 발발한다. 신앙의 성숙을 이끌어주는 (삶의) 보약을 권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당하고 정당해야만 한다. 그래서 보약을 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히 성기사(Knights Templar)로 여긴다. 보약을 거부하는 배우자는 상대적으로 사단의 무리가 된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에는 무척이나 거룩한 모습인데 거룩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가정에서의 모습에서는 거룩은 찾아보기 몹시 힘들다. 패배가 아니면 승리만 남는 그런 처참한 현장 일뿐이다.

배우자의 신앙이 성숙하면, 나 자신에겐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배우자의 신앙 수준이 가히 '의인'(the righteous; righteous person)의 반열에 올랐다. 이 사실이 나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배우자가 의인이기에, 상대 배우자인 나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만일 이 사실이 옳다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의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수준이 낮은 형제 또는 자매와 결혼하는 것은 철저히 거부당할 것이고, 결국 형제 또는 자매들은 신앙 수준에 따라 (마치 결혼정보 회사에서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 등급화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신앙에서의) 자격증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로써 '눈에 보이는 조건'들이 최우선시 되는 그런 영적 시대가 열린다고 할 수 있겠다.




다윗이 자신의 아내로 삼은 '나발의 처'를 생각해 보자.

나발은 (성경에서 인정하는) 미련한 자다. 그리고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성경에서 인정하는) 지혜로운 여인이다. 나발은 야훼 하나님께서 '치셨다'. 그로 그가 죽었다. 이 사실을 다윗이 명료하게 평가하고 있다.
  •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삼상25:38~39a.개역개정)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르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삼상25:39b)
  •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삼상25:42)


부부 간 어느 한쪽의 신앙 성숙도로 인하여 상대 배우자의 신앙적 미성숙함이 성숙으로 바뀌는 건 아니란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모든 경우를 증명하는게 아니라, 적용되지 않는 하나의 경우만 찾아서 설명하면 그 증명은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상대 배우자의 신앙적 성숙을 원하는 것일까?

답을 얻지 못하여 답답하다.

그러는 중에 상대 배우자가 과연 의인이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나의 신앙 수준은 미숙하다. 고로 의인이 아니라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인을 신앙의 전문가로 여기고서 설명한다면, 다음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할 수 있으리라 본다.

전문가 앞에서 초보자의 모습이다.

초보자가 행하는 대부분의 행동과 지식들은 전문가 앞에선 어리석고 후회할 것들 뿐이다. 전문가와 늘 함께 하는 중에, 초보자는 행하는 족족 전문가의 비평과 훈계를 감수해야만 한다. 초보자의 생각과 바라는 소망 조차도 전문가의 시각에서는 미흡하다. 그래서 늘 수정에 수정을, 보완에 보완이 필요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 행동은 율법적 행위입니다. 그리 하지 마세요"
"그건 야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본주의적인 모습일 뿐이예요"

등등.

이런 훈수를 감수할 수 있을까?

오늘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필자의 마음 속에는 많은 도전이 일어난다.
두 어린 자녀에게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신앙을 강요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부사이의 모습만이 아니라, 부모자녀간의 모습도 함께 포함되었음을 작성하는 중에 깨닫는다.

나는 또는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강제로 개종시키려 하고 있고, 이런 강제성은 거룩한 전쟁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행위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상처를 입을지에 대해 우려하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쟁취하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머리는 가득하다.

"승리. 승리"
"우리에겐 오로지 승리만 있다!!!"

ThoughtCo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일까?

야훼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다고 우리는 말한다.

야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여야 하는데, 우리들 사이에서는 비인격적인 모습이 나타나도 괜찮다는 말일까?

주님은 가장 천하고 가치없는 존재조차도 그를 귀하게 여겨주셨다.
그에게 "너의 생각은 어떻니?"라고 의견을 물어 보시는 분이시다.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분이 어찌 천하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에게 의견을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는 천한 존재일지라도 그의 생각을 헛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 자의 생각일지라도, 귀하게 여기시고 그런 생각을 자신의 사역에 반영시키셨다. 그래서 천하고 천한 우리가 가장 귀하고 고귀한 분의 사역에 반영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에서 영에 속한 자로 신분이 바뀔 수 있었다.

그랬던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너희들은 영에 속한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천하고 천한 자들로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야"
"너희들의 생각은 들어볼 가치도 없고, 물어볼 가치도 없다"
"너희들은 그저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돼"
"질문도 하지 마"
"의문도 갖지 마"
"그저 '네'라는 대답만 하고 그대로 따라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음으로써 '육에 속한 자'에서 '영에 속한 자'로 바뀜을 받았던 우리들이, '육에 속한 자'를 대할 때 비인격적인 대우를 한다?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마18장)이 생각난다.

조건 없이 '불가능한 빚'을 탕감받았는데, 이는 은혜다.

이 은혜를 다시 표현하면, 비인격적 존재가 인격적 대우를 받았다. 인격적 대우를 받은 우리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인격적인 대우를 베풀어야만 한다. 그럴 때 마지막 심판의 날, 심판대 앞에 서는 우리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 내가 주님을 위해 했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존중되고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는 뜻이다.

허나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던 우리들이 그 이후에 비인격적인 대우만을 베풀었다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이 행한 모든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인격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곧 어느 것 하나 존중되지도 않고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AZ Quotes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그렇다.

우리는 상대의 신앙 수준을 가늠하는 이들로서 택함을 받은게 아니다.
내가 받은 그것들을 그대로 다시 베풀기만 하라는 의미로서 택함을 받았다.

위로를 받았다면,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위로해 주면 된다.
긍휼을 받았다면, 긍휼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면 된다.
배려를 받았다면, 배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배려를 베풀어주면 된다.
용서를 받았다면, ...
사랑을 받았다면, ...
은혜를 받았다면, ...
인격적 대우를 받았다면, ...

상대의 신앙 수준을 운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서로는 "서로 사랑"하면 되지, 서로의 신앙 수준을 가늠하고서 그것을 비난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없지 않는가?

그러는 모습이 가정에 더욱 풍성한 활력을 가져오지 않을까?

"당신부터 바뀌세요"
라는 생각을 바꾸자.

"걱정하지 마세요"
"저부터 바뀔께요"

이같은 활기찬 말로, 우리의 내일을 더욱 힘차고 당당하게 바꿔나가는 그런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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