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났었던 예슈아.

엠마오는 어디일까?


엠마오(Emmaus; 온천)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32km 지점. 이곳은 성경에서 단 한번 언급되었고 이곳의 위치는 정확하지는 않다. 출처) holybible


지명조차 역사적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엠마오. 그런데 그런 곳으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 두 제자(눅24:33)가 길을 간다.


누가복음 24장(새번역)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13.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분명 베드로 등의 사도들과 더불어 함께 있던 무리들 중의 두 사람이다. 그 중의 한 명은 (어느 마리아의 남편) 글로바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biblia.co.il


누가복음 24장(새번역)
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중략)...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의문성이 짙지만 부활하셨을 거라는 이야기 등의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시점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왔다.

눅24:15 ...(중략)...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이를 보았다. 그리고 함께 대화도 나누었다. 그런데 그가 누군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눅24:16.새번역)

예슈아께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대화냐고 묻자, 글로바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18. 그 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글로바의 얼굴 표정이 어떠했을거라 지레 짐작이 갈 것이다.

질문하는 예슈아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훓어 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말로 내뱉었지 않았을까?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글로바는 장황하게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자세히 읽어보길 바란다.

누가복음 24:19~24(새번역)
...(중략)...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pixabay


글로바는 팩트(fact; 사실)는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설명 속에 어떤 믿음 곧 성경에 말씀하셨던 그 내용이 실제로 성취되었으리라는 확신에 찬 말을 찾아 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글로바의 설명은 훌륭했다. 충분한 상황 설명을 듣고 난 예슈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눅24:25~26)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 무디다고 부연설명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할 바가 있다.

성경적 내용 곧 '언제 누가 태어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결과들이 있었다'는 등의 사실적인 내용들을 유창하게 읊조릴 수 있다고 해서, 그의 놀라운 언변이 믿음있는 삶을 대변하는건 아니라는 뜻이다. 머리에 든 인간의 지식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삶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믿음의 분량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는 헛된 지식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상황에서 예슈아는 다시금 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눅24:27).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글들을 비롯하여 (당시 구약전체에 해당하는) 성경 전체를 설명해 주셨다. 그 안에 메시아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눅24:28).

두 제자들의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예슈아는 그곳이 자신의 목적지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시면서 자신은 그 마을에 머물지 않고 여정을 떠나려는 듯 "척"하는 행동을 보이셨다.
마음(계획)과 행동이 다른 모습을 보이셨으니, 그 순간 예슈아께서는 자신의 숨겨진 의도와는 사뭇 다른 행동을 일부러 보여 주었다. 이는 예슈아께서 보여주신 행동에 두 제자들이 속아 넘어가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눅24:29a)

저녁이다. 그러면 누구든지 저녁 식사를 해야만 한다. 밤길이 위험하니 잠을 편히 잘 수 있는 쉴 곳을 찾아야만 한다. 이때 두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배려하는 마음"(마7:12)이 있었다. 어두운 길에 누군가가 길을 걷고 있다면,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영접하여 그의 주린 배를 채워줄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러자 예슈아는 흔쾌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 들이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눅24:29b~30).

그리고는 빵(lechem; 레헴)을 들고 축복하신다. 그리고 떼어 주셨다.

뜬금없다.

누가 원한 것도 아닌데, 왜 이같은 행동을 하셨을까?

본래는 집에 들어오는 것보다 자신의 남은 여정을 가야 할 것처럼 행동하시던 양반이, 집에 들어와서 음식을 드시라고 권하닌까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 누구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시키지도 권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당당하게 그런 행동을 한다. 마치 본래 이 두 제자들을 향하여 의도했었던 사람처럼.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눅22:19)

최후의 만찬이 있던 그 당시, 12제자에 속하지 않았던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어떻게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예슈아는 빵을 들어서 감사(축복)드리고, 그 빵을 떼어서 나눠주었다. 그 빵은 예슈아의 몸이신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예슈아)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형식적이든 성찬을 행한다. 성찬을 행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성찬을 행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예슈아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누가복음 24장으로 돌아가보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눅24:30)


이 일이 있고나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눅24:31a)

그제서야...라고 성경은 표현했다. 그런 의식을 행하고 나서야 비로서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곧 그들의 가려졌던 눈이 열려, 예슈아를 알아 보았다. 즉 예슈아를 기억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수 없었는데, 성찬식을 행하고 나자 기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허락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처럼.

이 일을 가능케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

pixabay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개역개정)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은 여러 시간 동안 예슈아와 얼굴을 맞대어 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도 예슈아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 허나 예슈아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눅22:19)처럼 성찬이 행해지자,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예슈아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분명히 예슈아께서는 마치 "너희들의 머리를 쥐어 짜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기억해 내라"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말씀의 의미가 그렇지 않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해 주신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시는 그 본래 목적은 예슈아를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성찬을 지켜행하면 된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예슈아를 기억나게 해 주신다. 이것이 그의 명령 곧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주신 복이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눅24:31b)

하지만 우리가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는 시점에서 예슈아는 우리에게서 사라지신다. 성령이 그를 낚아채듯 데리고 어디론가 가셨다. 마치 빌립이 성령에 '이끌리어'(rapture; 휴거) 에디오피아의 내시 곁을 떠났던 것처럼, 예슈아는 시몬 베드로가 있는 갈릴리 바다로 가셨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전할 때가 있다. 그저 무덤덤하게 들리는 순간이 아닌 때가 있다. 이상한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눅24:32)

내가 의도해도 애쓴다 할지라도 이끌어 낼 수 없는 현상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타난다면 그 순간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이는 예슈아시다.
허나 우리가 어느 순간 예슈아를 기억하게 되면, 영이신 예슈아는 그 순간 사라지고 육신의 한 사람만이 나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는 이 말씀이 매우 추상적이라 여길 수 있거나 혹은 비유일 뿐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경험했던 그와 유사한 경험들이 우리 삶 속에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경적 지식은 머리 속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하지만 궁금해 하면서,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예슈아께서 그들에게 홀연히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기억나게 하면서 깨닫게 하시어, 결국 예슈아를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방식으로 예슈아를 만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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