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슈아를 본 받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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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께서 행하신 일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 안의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일반적인 우리네들의 모습과 현저하게 다른 모습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모습"
이다.


어떤 악조건의 환경이 있을지라도 예슈아는 불평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환호성을 외치는 경사스러운 상황이 펼쳐질 지라도 예슈아는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셨다.


자신에게 현재의 상황을 허락하신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다.

그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를 만나면 늘상 감정의 기복을 경험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슈아는 능히 극복하실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걸까요?
왜 우리의 마음 속에 (예슈아께서 주시는) 자유가 없을까요?
왜 우리는 현 상황을 두려워함으로써 낙심하고 좌절하고 싶은 마음을 품을까요?


예슈아의 기록된 모습을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안 되는 상황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체, 무너지는 마음을 품고 있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당당하게 맞아 섰습니다.
그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나요?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그 상황은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내가 품기엔 너무 뜨거운 돌과 같아서, 오히려 나를 태워버릴 수 있기에 허락지 않으십니다.

반면 내 기준에,
내 생각에는 전혀 합당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허락되는 강권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나로써는 피하고 싶은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게 강권적으로 허락하십니다. 이는 내가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이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가 능히 품을 수 있는 만큼의 열기를 품은 돌이기 때문에, 몸이 차가운 내게 온기를 주시기 위해 품도록 하시는 뜨거운 돌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그 안에서 내 뜻과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지 마시고,
내 뜻과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현 상황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하시면

장차 여러분에게 다가올 그 기쁨의 크기가 얼마나 되시는지 아시나요?
장차 여러분들이 받게 될 기업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은 되시나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분을 모든 정사와 권능과 강력과 통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리는 모든 이름보다 훨씬 위에 두셨고
  • 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아래 두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사 교회를 위해 주셨느니라.

(엡1:21-22.흠정역)


예슈아께서 이루셨고, 그럼으로써 얻으셨던 영광을 잘 보십시오.
예슈아를 본 받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도 동일한 영광이 허락됩니다.


  •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
(엡1:23.흠정역)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는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은 예슈아를 본 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풍성한 영광이요 상급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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