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살리고 싶다면, 다니엘이 했던 것처럼 "왕의 산해진미"를 먹이지 말라.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단1:3a. 흠정역)


느부갓네살 왕이 "내시의 우두머리"에게 하는 말이다. 내시는 누구였던가? 그는 남자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역할(기능) 일부가 상실된 자다.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는 "내시"(환관)라는 직업관에서부터 시작된다.

  • 내시로 표현된 히브리어 saris(סריס)는 "eunuch"로 '환관, 내시, 거세당한 남자'란 뜻을 갖는다.


...아스부나스가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단1:3b~4. 흠정역)

내시 우두머리(환관장)는 바빌론의 모든 노예(포로)들 중에서

  • 이스라엘 자손
  • 왕의 씨
  • 통치자

들을 1차 구별한다. 그렇게 구별된 자들 중에서 조건을 더하여 2차 구별을 시도한다. 그 조건으로서


  • 흠이 없고
  • 잘 생기고
  •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 지식을 두루 갖추고
  • 과학을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럴 때 "왕의 궁궐에 (능히) 설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단1:4. 흠정역)


  • 구약 성서에 "과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데 의아해 하실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 KJV과 ASV에서 "Science"로 번역된 madda(מדע)는 명백하게 안다는 의미에서 'knowledge, thought'란 뜻을 갖는다. madda는 yada에서 파생되었는데, yada(#3045; ידע)는 전능자의 손(hand; יד)눈(eye; ע)이 합성된 상형문자다. 이는 Torah(성경)를 가르치고 있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참고 자료: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토라와 야드.)
  • 히브리인들은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교사로서 부모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읽고 있는 그곳을 손(yad; יד)모양의 포인터를 사용하여 정확히 지명하여 가리켜 준다.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명확한 앎(knowledge)을 얻게 하고, 그 앎을 통해 스스로 생각(thought)할 수 있는 자로 세워준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교육법으로 성장한 이를 "학자"라고 부르고, 그런 학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을 "과학"이라고 칭한다.



자신의 자녀가 다니엘처럼 성장되기를 바라는 "믿는 가정"은 참으로 많다.

하지만 "다니엘의 성장 과정"에 대해선 궁금해 하지 않고, 그저 "하루 세 번 구별하여 기도하는 것"만 행하면 되는 줄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의 억척같은 강요에 자녀들은 더욱 힘들어 하다가 부모의 보호를 벗어날 수 있는 연령에 다다르면 가차없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버린다. 심지어 부모가 믿는 그 신앙의 공동체까지도.

"과학"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중에 "히브리인들의 교육법"이 잠시 소개되었다. 자녀에게 명확한 이해를 얻게 하고 그로 인하여 충분한 사고력을 갖게 하는 교육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자신이 소망을 담고 있는 그 대상(눈; 소망)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임(손; 가리킴)으로써 그런 부모의 모습을 그 자녀가 보고 배우게 한다. 이처럼 부모의 눈과 손이 서로 합력할 때, 그 자녀는 온전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 교육은 madda로서 과학(science)이라 불리는데, 이는 그 자녀를 절대 권력자 앞에 능히 설 수 있게끔 한다.

여러분.
자녀 교육에 대해 잠시 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그렇게 성장한 자녀가 (성경 속 현실에서는) 내시로 발탁되었는데, 그 내시들은 자신들의 기본 능력에

  •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
  • 갈대아 사람들의 말

을 익히게 된다.

갈대아는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요 지역이다. 요즘의 미국이라 할 수 있다.
"맹모삼천지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을 자녀를 위해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각 사기업은 물론 공기업까지도 유학파들을 대거 등용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내시(환관)라는 부분에서 잠시 망설일 수 있을 뿐, 그 외 모든 나머지 환경은 세계 최고의 환경이 다니엘에게 제공되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사실 못가서 안달이지, 보내준다면 어느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과 함께 하는 바빌론의 내시들은 세계 최고의 브레인이라 여김을 받을 텐데.


  • 세계를 움직이는 전략기획가, 다니엘!
  • 세계의 브레인, 다니엘!
  • 세계의 흐름을 조절하는 다니엘!


너무나 멋진데, 어느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예루살렘에 살았더라면 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나라가 망하여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이 화려하고 미래가 보장된 완벽한 환경을 다니엘은 얻었다.

그의 시작은 이처럼 창대함 그 자체로 시작된다.

그래서 그에 걸맞는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신 포도주에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어
이렇게 삼 년 동안 그들을 양육하였으니(단1:5a. 흠정역)

왕이 직접 명령으로 확정해 놓았다.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그것도 매일마다 먹게 했다.

즉 포로라는 신분과 내시라는 신분을 제외하면, 왕과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다. 너무 완벽한 삶과 그 환경이지 않을까 싶다. 골치아픈 국정 일 때문에 입맛이 상할 일도 없겠다. 자신에게는 어떤 공적 업무도 할당되지 않았기에, 그저 (왕의 음식을)먹고 (왕의 포도주를)마시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음이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그런데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아무 생각없이 권위자가 시키는데로 행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권위자의 명령은 어길 수 없다. 어길 경우 "너희가 왕을 위해 내 머리를 위태롭게 하리로다"(단1:10b. 흠정역)처럼 누군가는 버거운 책임을 감당해야만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 올 수 있다. 그런데 아무런 사고판단 없이 그같은 일은 추진하려 할까?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 그 자체보다, (명령 속에) 숨은 왕의 의도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추론하게 된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표현 하나가 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왕이 대면하고자 하는 내시(후보생)들은 누구였을까?
탱탱한 얼굴 살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그런 미련한 자?
과연 그런 자들이 당대 세계 최고의 국가를 위해 전략을 세우고, 그 나라의 미래를 기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의 마음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원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간파했던 왕의 마음은 바로 그것이리라.

이것이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시키는 또는 자녀를 망가트리는 부모의 잘못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자녀에게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완전무결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을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 생각하는 현대인들.
그래서 자녀에게 어떠한 훈계와 채찍도 가하지 않는다.
자녀에게 힘든 일은 하나도 시키지 않는다.
결국 그 자녀에게는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집중하게끔 부모는 노력한다.

그렇게 성장한 자녀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배부른 돼지가 아닐까? 타인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만 급급해 하는 돼지.
주린 배를 채우는데 방해가 된다면 부모는 물론이고 형제 자매까지도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그런 돼지의 모습을 가진 자가 되지 않을까?

부자의 가정에서 부모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하려 할 때, 친형제와 친자매들 간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매스컴을 통해서도 익히 볼 수 있는 정반대의 상황들도 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고, 장애를 경험한 자가 장애인을 돕는 현실.
가진 재산은 없지만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더 아껴주고 챙겨주기를 더욱 힘쓸 때, 보는 이들은 더욱 큰 감동을 받지 않는가?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화려한 환경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배부른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 오히려 배고픔을 감수하는 고통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돼지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배고픈 자의 삶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 곧 사람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이나 왕이 마신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단1:8a)는 말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가 다니엘을 더럽힐 수 있다는 그 의미를 이해하셨는지요?

자신의 자녀를 양육하는 바도 이와 같다.
왕의 진귀한 산해진미와 각종 맛갈스러운 음료를 제공하고, 세계 최고의 편리한 환경을
자신의 자녀들이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부모들이여.

그것은 오히려 당신의 자녀를 망치는 일입니다.
그 자녀는 장성하면, 오히려 부모인 당신까지도 먹어 치워버릴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는 자신이 먹고 있는 여물통 속 찌꺼기에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에만 기뻐할 뿐, 그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죠.

성경은 말합니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에 그를 징계하느니라.(잠13:24.흠정역)



최소한의 윤택을 제공하기에 힘쓰십시오.
윤택이 과하면 당신의 자녀는 낭비를 잉태하게 됩니다.
GooseReport


최소한의 편리를 제공하기에 힘쓰십시오.
편리가 과하면 당신의 자녀는 배부른 돼지를 낳습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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