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몸, 아픈 몸을 허락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우리 삶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pixabay

그 둘 간의 차이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
이지 않을까?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곧장 순종하는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뜻하는데로 모두 행할 수 있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몸의 불순종함을 경험하는 자다.
하반신 마비인 사람의 경우, 의지적으로는 걷고 싶으나 몸은 그 의지적 결단에 순종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차이.
부인하기 힘든 차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건강한 삶과 아픈 삶을 허락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리라 믿는다. 건강한 삶을 허락받은 이는 복을 받은 자요 아픈 삶을 허락받은 자는 저주 받은 이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신데. 왜 우리에게 아픈 삶을 허락하셨을까?

아픈 사람에게는 그 갈급함이 더욱 커져가는게 있다.
바로 건강한 사람의 삶을 향한 갈급함이다.

그 갈급함을 느끼게 하시려는 부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의도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의지, 곧 자유의지로서 몸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생명이 가득한 상태는 분명 건강한 상태다.
그래서 살펴보면 건강한 몸 상태는 분명 의지에 순종하는 몸과 그의 기능들이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도 다 인정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유의지로 몸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이요 생명력이 강한 자의 삶이다.

그럼 이러한 생각을 좀더 확장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풍요로운 삶이 있는가 하면 몹시도 곤욕스러운 고통의 삶이 있다.

풍요로운 삶을 사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의지대로 살아간다.

반면 곤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은

(누가 쳐다보지도 않지만) 자신의 추함을 열심히 감추고 주변 사람들의 눈을 심히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자존감이 심히 무너진 삶을 산다. 하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풍요로운 삶, 곧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갈급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 명성이, 권력 등을 소유할 때 세상에 대해서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재물과 명성, 권력 등을 빼앗아 버리면, 그들은 곧장 자괴감 높은 삶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 예슈아를 아는, 그의 제자된 자는 다르다.

재물과 명성, 권력 등이 없을 지라도,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며 조롱할 지라도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상을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슈아를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슈아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은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세상을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당당함을 가진 자다.
그래서 그런 세상을 능히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자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1:21-22.개역개정)

우리에게 본(role model)을 보시셨던 예슈아의 변화된 실상을 눈여겨 보길 바란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세상을 상대로,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셨던 예슈아의 변화된 위상을 보라.

모든 것을 자신의 이름 아래에 두시고,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
이렇게 행하신 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창1:28.흠정역)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가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은 그런 위상의 인물이 되기 위한 "훈련"(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명확한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제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믿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을, 질병을 주시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참 뜻하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리라 믿습니다. 예슈아께서 참 본을 보이신 그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강조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그 시점은 이미 절반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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