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와 조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을 주도하는 사수가 있는가 하면 사수를 보조하여 돕는 자로 발탁된 조수가 있다.

사수와 조수의 관계는 어느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조수는 항상 사수의 뒤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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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7b~8)


성경 속 내용은 사수와 조수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 물건 그 자체에 욕심을 낸 자는 절도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


  • 반면 물건에는 욕심이 없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람(A씨)을 미워한다. 그런데  A씨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A씨가 (물건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몹시도 슬퍼하고 낙심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도록 그는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소유했을 즈음이면, 그 물건이 망가지든 없어지든 상관하지 않은 채로 가치없이 여겨버린다.


어찌보면 동일한 절도행각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사실은 다르다. 


전자(the former)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the latter)는 어떤 사람을 미워하였기에 죄를 범했다. 그의 죄는 욕심에 근원이 두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  "도둑"이라는 죄명이 "살인자"라는 죄명과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민27:3a)

슬로브핫 딸들의 고백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야훼 하나님을 대적(betray)한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배신"(betray)이라는 테마는 "복수를 꿈꾸는" 드라마 속의 흔한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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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어린 나이에 그저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렇게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여자의 부모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결혼하였다. 남자의 복수는 여자의 집안을 몰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집안의 몰락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에 여전히 관심이 쏠려 있다.

"내 부모님께 지난 날에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선 진심으로 미안해요."

"그런데 단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당신은 그래도 절 사랑했었던 거죠?"

집안이 몰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자신의 우둔한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에도, 여자는 이 사실 때문에 낙심해 하진 않는다. 몰락한 집안은 다시 살리면 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당신 집안이 몰락하기만을 바라면서, 당신과 치욕스런 결혼을 견뎌냈을 뿐이야."

그 말과 함께 여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삶의 소망이 사라졌음을 직감한다. 그녀는 남편을 향해 영원한 증오를 품는다. 자신의 집안을 몰락시킨 장본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처참하게 짓밟은 자로서.

이런 류의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도 제목은 생각이 나질 않지만, 나라를 불문하고 다양한 드라마들이 즐겁게 다루던 주제였으리라.

남자가 처음부터 여자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했다면?

여자는 남자를 용서하였을 것이다.
먼저는 자신이 남편의 지난 과거에 대해 "용서를 비는 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몰락하게 된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고 남편과 함께 전심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굳센 결의를 구하는 자"가 되었으리라.
아름다운 스토리가 펼쳐질 뻔 했다.

헌데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고백해 버렸다. 그러자 여자의 마음은 굳게 닫혀버렸다. 그렇게 닫힌 마음은 자신의 부모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짓밟은 "그 남자"에 대해선 영원토록 증오하게 된다.
어떠한 자비도 긍휼함도 없는 증오로서.

필자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
과 같다고.

조수는 사수를 대신할 수 없다.

그저 사수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허나 사수의 미처 말을 하지 않을 지라도, 일이 진척되는 상황에 따라 사수의 일을 "미리 준비"(예비)할 수 있는 지혜(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조수는 사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을 떼지 말고 늘 주의깊게 관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조수가 사수의 일을 제대로 보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사수는 생각할 것이다.

조수가 단순히 착각 혹은 미숙함으로 인하여 사수의 일을 그르쳤다고 판단되면 사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 상사야"
"일을 하다보면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포기해버리면 어떻게 전문가(달인)가 될 수 있겠느냐?"
"백전백승이 아닌 백전노장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 두 번의 작은 실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수의 말은 실수로 인하여 의기소침해 있을 조수에게 위로와 권면과 덕을 세우는데 충분하리라.

허나 조수가 사수의 자리를 탐하여, 사수보다 자신을 돋보이려 했다고 여겨질 경우, 사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수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탁월한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다."
"그저 사수의 일을 옆에서 보조하고 친구처럼 함께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면 된다."

"하지만 사수를 무시하는 조수는 더 이상 필요없다."
"너는 내게서 떠나라!"

자비와 긍휼을 얻지 못한다. 사수의 자리를 탐하는 자에게는 사수의 자비가 머무를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이는 "더 이상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적용된다.


여러분.


이런 사실은 일상다반사의 한 가지로서,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 속에 천국을 알게 하는 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조수는 일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합니다.
반면 사수는 일의 시작과 끝을 압니다. 사수만의 몫인 것이죠.
그가 일이 시작되는 그 시간을 알리고, 일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여길 때 일이 끝나는 그 시간을 이야기 합니다.
고로 사수의 일은 반드시 흥(온전)해야 하고, 조수의 일은 늘 쇠(보조적으로)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일의 상세한 부분까지 알려 할지라도, 경륜이 부족하면 알려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려주나 마나 매 한 가지입니다. 그저 모르는 자와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옆에서 돕는 일에만 충성되게 행하면 됩니다.

조수는 모든 일을 행할 때, 반드시 사수에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사수는 대답합니다.
조수는 그렇게 사수의 음성(voice)을 듣는 고로 행하기만 하면 족합니다.

삶의 작은 경험이었지만, 간판업을 하시는 매형의 일을 돕기 위해 나아갔더니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군요.

각자의 삶에 대해서 사수는 누구이며 조수는 누구일까요?
기도하는 중에, 찬양을 하는 중에, 그리고 설교 등을 듣는 중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고백하죠.

"내 모든 삶을 모두 주께 드립니다."

그럼 그 삶의 주인이요 사수는 누구실까요? 이 사실이 확실시 되면 조수는 자연스럽게 당첨되겠군요.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나아가는 그런 지체분들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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