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란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저주스러운 삶.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youtube (이하 모두)


이렇게 시작된 그의 교도소 수감생활.

죽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 교도소 수감생활이라 여겼기에, 그의 마음 한 켠에는 여유가 있었다.






당초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의 수감 생활은.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수감 생활"보다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살아남는 편이 죽는 것보다 좋다고 여겼던 그가, 왜 선택을 뒤바꾸게 되었을까?

누군가가 그를 못살게 때려서?
무서운 짐승에게 할큄을 매일같이 당해서?

아니다.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할 만큼 더 두렵게 만든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시 교도소는 죄수들로 가득했었는데, 통제가 되지 않아서 너무나 힘들었었다.
그래서 교도소 운영자들은 "통제 가능한 시스템"을 찾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통제 가능한 시스템"
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영국의 기술자 "윌리엄 큐빗"은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기구는 참으로 단순했다.

그저 발로 밟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뒤에서 때리거나 앞에서 강제로 잡아 끄는 것도 없었다.
그저 단순한 동작 하나면 충분했다.





죄수들의 눈에는 너무나 간단했고, 그래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가뿐히 할 수 있는 운동보다도 쉬워 보였다.

그런데






단순하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그 일은

모든 죄수들에게 공포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일이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에레베스트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은 막중한 노동량에 시달렸다. 단순하기에 겉으로 보이는 노동량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노동의 량은 달랐다.




대화가 단절된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
그런 삶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지옥" 그 자체였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삶, 거기에 대화까지 단절된 삶은
느끼는 자에게 지옥의 삶을 살게 한다.

가정폭력은 주먹으로 때리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화없이 단순히 반복적인 부부생활은 사는게 아니란 의미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곳을 찾는데, 그 출구가 죽음이 된다. 마치 죄수가 죽기를 더 원했던 것처럼.

  • 육신을 떠나면 우리 모두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 앞으로 간다. 그분은 소망이다. 그분은 생명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망을 찾지 못한 자, 세상에서 소망을 모두 잃어버린 이들이 마지막에 찾는 곳은 다름아닌 죽음의 너머다. 그곳에는 분명히 생명되시고 소망되시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야훼 하나님께서 죽음의 너머로 인도하는 이는 소망을 찾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죽음의 너머를 찾는 이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고독한 삶은 통제 불능의 존재를 능히 통제 가능하게 한다.
그 통제 시스템에는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래 전의 우리는 다양하면서도 예측 불가의 삶들을 살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예측 가능한 삶들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오고 있죠.
그 출발에는 "편리"가 있었습니다.

Kelprojektas


편리한 삶은 예측 가능한 미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simcitizens


그래서 언덕을 오르는 길에 계단이 건설되고, 이후에는 에스켈레이터로 대체됩니다.
예측 불가의 길에 단순함이 놓이게 되고, 그 이후에는 무한히 반복되는 단순함의 길이 대체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길을 좋아합니다. 

편하다고 느낍니다. 자신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누군가의 노력만으로)자신의 모든 일들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먹고 즐기는 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저 누군가가 깔아 놓은 멍석에서 마냥 누리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마24:37-38)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왜 문제시 되는지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장) 

그들의 행함 속에 "헌신" 또는 "수고"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합니다. 대략 1000 살까지 살았으니, 단순한 삶을 1000 살을 살도록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창조주 야훼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 대화가 단절되어 버렸다"
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삶은 어땠을까요?
그 관계는 어떤 모습이 이었을까요?

영상 속 죄수들의 바램처럼 "차라리 죽여주세요"라고 부르짖지 않을까요?

  • 이런 상황 속에서 부부가 이혼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 우울증 환자의 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요?


대화없는 가정 속에서 집과 학교를 무한 반복하듯 왕복운동하는 자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녀는 지옥에서 사는 것과 동일한 저주의 무게를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 소망없이, 먹고 살기 위해 출근하고 퇴근하기를 무한히 반복하는 가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체, 밥을 차리고 치우고, 빨래 하고 입히고 벗기는 단순하듯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사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실 수 있을까요?



영상은 이러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영상 보기>








이러한 삶은 사람들의 인권을 훼손한다.
생명을 존중하는 이의 모습이라면, 이렇듯 단순하고 대화가 단절된 반복적인 삶을 제안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챗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는 여전히 우리네들의 거실 한 켠에 놓여 있곤 합니다.
pixabay

산업의 분업화로 인해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업종의 형태가 우우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무수히 많은 시민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수준이 얼마나 큰지, 이제는 이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시대에는 "가정의 영향력"이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지옥과 같은 삶의 무게감을 견디며 직장에서 돌아온 가족을 따스한 사랑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훼손된 인권이 다시 소생될 수 있는 곳이 있다면,그것은 가정 입니다.

이 시대에는 온전한 가정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 대화가 살아 있는 곳으로

예측 가능한 지성이 가득하기 보다는, 예측이 불가능한 감정들이 풍성하게 나뉘는 그런 가정.

그런 가정을 이룩하고, 지켜나가실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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