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거하는 삶과 그 모습이란? 기존의 상념을 뛰어넘어 보자.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어떤 "로망"을 품고서 기대한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 당연함 안에 천국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의 삶은 어떠할 것이라고 우리는 "공식"처럼 여기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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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만년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삶을 영원불멸의 삶으로 간주하고서, 천국에 가는 이들은 이런 삶을 살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각종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집(거처)가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 이또한 굳게 믿는다.
※ 그러다 보니 어떤 천국 간증을 들어보면, 자신의 집이 허름하기에 매우 낙심하였다고 전하는 분들을 보곤 한다. 그렇다는 것은 좋은 집과 나쁜 집이 나뉘고, 화려하게 치장된 집과 허름한 집으로 구분이 되기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그곳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일까? 그럼 천국에서도 부동산 투기는 여전히 지속되는 것일까? 그곳에서도 못 가진 자의 서러움은 사라지지 않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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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할 수만 있다면 "생각하는 삶"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려한다.

천국에 대한 부분도 "스스로 묻고 질문하는 사고의 부분"이라 여기면서,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을 법한 내용을 함께 나누려 한다.
※ 먼저 이전에 게재한 글 "저주란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저주스러운 삶.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글을 읽어보시길 강권합니다. 본 글에 대한 이해가 훨씬 풍성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Club Cleo


현시대는 고령화 시대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단편적인 사례를 이야기 해 보자.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 속에서 노부부는 이른 아침을 먹고 곧장 근처 공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매우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이미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나이드신 노인분들이 많다. 화려한 과거가 없는 이 하나 없건만, 이곳에 모인 이들의 모습 속에서는 그 어떤 화려함도 찾을 수가 없다.
입술로는 "자신의 자녀와 며느리, 사위와 딸"을 자랑한다. 세상이 이보다 더 효심이 큰 자녀는 없다고 목에 힘을 주어 칭찬한다. 그러나 자신은 정작 이른 아침부터 젊은 사람 하나 없는 공원에 앉아 있다.

점심이 되면 무료 급식소를 찾아가서 점심을 먹는다. 이 마저도 집에서 해결하는 이 한 명 없다. 그리고 또 공원에 앉아 있다. 이런 생활을 얼마나 했을까? 이제는 어떤 대화를 해야할지, 그마저도 고민이 될 정도로 소재꺼리가 궁핍해진 대화 분위기다.
해는 점점 뉘엇뉘엇 산을 넘어가고 있다. 땅에는 땅거미가 찾아오고 거리의 간판에는 하나 둘 씩 불빛이 켜져만간다. 노인분들은 다시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한다. 며느리가 차려준 밥을 곱게 먹고서 조용히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내일은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지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고령화 사회가 갖는 대표적인 문제점 한 가지를 살펴보았다.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이기에, 이정도만 설명해도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럼 질문 하나 해 보자.

"할 일 없이 오래 사는 것"이
과연 복된 삶일까?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인 시대에 살고 있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는 "휴식"(쉼)이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다. 그러나 취직을 못하고 있는 백수에게는 "휴식"(쉼)이 일상의 모습 그 자체다. 그는 어제도 쉬었고, 오늘도 쉬고 있으며 내일도 쉴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물어보자 "당신의 백수로서의 삶 속에서 소망이나 기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백수에게 있어서 "휴식"은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저주받은 삶"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의 성경적 사실을 함께 나누면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이전의 시대에 대한 사실들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보통 대략 1000 세의 삶을 살았다.

80 세만 되어도 고령화 사회로서 각종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 당시엔 너나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1000 세를 살았다. 그들은 무엇에 집중하며 무엇을 즐기면서 살았을까?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무료해 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 당시에 대해 야훼 하나님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계신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6)

아니 야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셨건만, 자신의 행하심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23:19a)

자칫 잘못 해석하면, 창6:6의 구절과 민23:19의 말씀들이 서로간에 충돌(대적)하고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말씀은 절대로 서로간 충돌(대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충됨을 올곧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뒷 편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노아 시대의 사회상을 좀더 나눠보기로 하자.

이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희 또는 유희를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있었을까? 

실제로 인간이 천년을 살아갈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요 절대적 왕국이다.
그런데 그 왕국의 시민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가?

홍수 前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3:38-39)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야 할 부분이라곤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는 것" 외 나머지는 그저 손만 뻗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a)

그래서 배고픔도 없고, 날씨는 늘 좋기 때문에 아무대서나 (먹고 마신 후) 잠을 잘 수 있었다. 맹수도 당시에는 풀을 먹었기에, 인간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라곤 하나도 없다. 무엇이 걱정이 되랴. 걱정거리가 없다. 만사가 형통하다. 갈급함을 느낄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이 채워져 있다.

그랬더니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 재벌 2세 혹은 재벌 3세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허나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할 만큼 잘 갖춰진 생활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의 모습은 세간에 gossip거리로 즐겨 회자되지 않는가? 왜 그렇게 밖에 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최고의 지혜자인 솔로몬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황 속에서 천년을 살아간다.

너무나 멋지지 않겠는가? 이보다 더 멋진 삶이 있을까?

세상의 그 어느 왕도 얻지 못한 것을 얻은 자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왕상4:29)

세상 최고의 지혜와 총명, 그리고 넓은 마음까지 그리고 각종 보석류와 재물될 만한 것들은 사상 최고로 보유하고 있던 자가 말한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1-2)

잉?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까?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았던 전대미문의 지혜와 총명, 그리고 넓은 마음을 지닌 그것도 "왕"(king)이 왜 이런 말을 할까?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천국은 "부족한 것 없는 삶"이 보장된 곳이라고 여긴다.
충분히 살 수 있고,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며 충분히 쉬고 노닐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년의 삶을 살던 자에 대해서 야훼 하나님은 "후회한다"(창6:6)고 말씀하시고, 전대미문의 지혜와 총명, 그리고 넓은 마음과 각종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는 "헛되다"(전1:1-2)고 말한다.

성경은 "헛된 삶"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을까? 사실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필자는 약간 "비스듬한(곁눈질로 볼 수 있는) 각도"(glancing angle)로서 다시 바라보길 원한다.

우리가 바랄 것은
"헛되지 않은 삶"
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미 "헛되다고 증명한 삶의 모습들"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않는 자 되기를 (성경은) 바라고 있지 않겠는가 하고 제안해 보려 한다.
※ 이것이 창6:6절과 민23:19a절의 두 말씀을 서로 상충되지 않도록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라 하겠다.
창6:6에서 야훼의 고백하심은 자신의 후회하심을 뜻하는 바가 아니다. 최고의 지혜자가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하게 준비된 환경의 경우) "모든 것은 헛되다"(전1:2)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풍족하게 상황 속에서 천년을 살아가더라도 인생 그 자체만으로는 "후회스러운 삶"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던 것(창6:6)이다. 그렇기에 야훼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시(민23:19a)고 그의 역사하심은 항상 "믿음이 연약한 인생들"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년을 사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뜻이다.

부족하지 않게 사는 것?
이 또한 본질이 될 수 없고, 거론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본다.

지혜와 총명, 넒은 마음 그리고 각종 부귀영화와 아울러 화려하게 치장된 궁궐?
이러한 것은 헛되고 헛되다고 표현될 만큼 가장 헛된 것이다.

전도자는 이렇게 강권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12:1-2, 6-7)


  • 야훼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자녀들을 기억(zakar; זכר)하셨다.
  •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zakar; זכר)하리라(창9:16)고 하셨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zakar; זכר)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b)고 하셨다.


모든 필요가 채워진 환경, 부족함 또는 갈급함이 없이 모든 것이 충족된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생명이신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여러분.
천국이 그런 곳이라 생각하시나요?
천국의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야훼 하나님을 대신해서)
여러분을 만족시켜주길 원하시나요?

여러분은 다시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는 중에
당신의 모든 필요는 누구를 통해서만 공급받길 원한다고 고백하셨죠?

그런데 천국에서는
주변 환경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기를 바라시나요?

각종 화려한 희귀한 보석류로 치장되고 잘 차려진 음식이 늘 가득한 궁궐이라 할지라도,

  •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 없고,
  • 야훼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옥을 바라는 것입니까?
곁눈질로 볼 수 있는 시각(Glancing angle)은 삶에서 매우 소중하다고 봅니다.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온전하지 않는 사실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 우리들에게 "생각과 사고의 여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귀한 틈(기회)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이 충족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삶 속에서는 영적 무능력 자들도, 심지어 악한 자들도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들로 가득한 곳에서, 어느 누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범사에 감사하길바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살전5:16-18a)
을 기꺼이 순종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영적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는 고통 외에 어느 것 하나 느낄 수 없기 때문이죠.

고로 영적 무능력함을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이 충족된 삶"을 향해 전진하는 반면,
영적 능력을 가진 이들은 "부족한 삶 속에서 그 삶을 거뜬히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을 얻기 위해 전진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능력은
삶의 모습이나 그 종류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마음을

삶의 작은 간증들로 "다시 채우고",
이로써 온 마음을 "정복하여"
자신의 삶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다스릴 수 있는 자"

가 되는 것에 있다

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창1:28.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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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의 모습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
자신과의 끊임없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복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건강을 얻는다.

그는
살인(죄)을 면한다.

그는 자는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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