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기에 합당한 나. 그런 내 모습은?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나 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자신의 생일날을 기대하면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즐겁게 알리는데,
나는 내 생일을 부끄러워 했다.
주변 사람들이 알까봐 숨겼다.

그래서 나는
애써서 돈을 모왔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할 손 싶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주머니에 돈이 줄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채워 넣을 능력도,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내 몸이 불치의 희귀병에 걸려 버렸기 때문에.


그후 나는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 순간부터 칩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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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상의 모든 관계가 끊어지자

내가 예슈아를 보는 계기가 열렸다.
비록 내 수중에는 일말의 재물도 없지만,
예슈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재물없음이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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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가난한 자가 되었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몰골이 흉해졌지만,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하찮다고 여겼던 내 모습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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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께서 사랑하는 자,

예슈아로부터 가장 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는 것은
돈으로 평가되지도 않고,
건강으로도 평가되지 않으며,
오직 예슈아를 아는 그리고 알아가는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귀함을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나의 가치관은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교회(공동체)안의 더러운 (쓰레기가 가득한) 곳을 치울 때면,
예전에는 불평 불만을 늘어 놓던 내가
이제는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나.

그런 내가 하는 일(수고; 헌신)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나.

그런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예슈아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나.

그런 내가 소속되어 있는 가정(공동체)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곳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안의 쓰레기 통을 버리는 일이
내겐 귀한 일이 되었다.
교회(공동체)의 바닥에 버려진 오물덩어리를 치우는 일이
내겐 기쁨을 가지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나를 향해 불평 불만을 쏟아 붓는 가족이지만,
나의 행동을 절제함으로써 그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쁘게 인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내가 사랑받음을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사랑받기에,
  • 내가 하는 일은 소중한 것이고
  • 내가 서 있는 곳도 귀한 곳이며
  • 내 가정도 능히 사랑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막12:31b. 새번역)

이제는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떤 의미를 품고서 기록되었는지 그 숨겨져 있던 의도요 기록되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둘째 계명이다.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중략...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막12:28.새번역)

모든 계명 가운데서 "으뜸"(אב)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그런데 예슈아께서는 "그 으뜸"을 "첫째와 둘째"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이 틀렸을까? 예슈아께서?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막12:29a.새번역)
둘째는 이것이다......(막12:31a)
    ☞  창세기 1장 1절 속에 숨겨진 큰 비밀

  • 한 분이신 아바(אב)가 스스로 둘로 나뉘어 사랑(אהב)이 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학자조차도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막12:32a)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좀더 살펴보면,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중략"(막12:29a)로 설명이 시작한다.
곧 가장 귀한 으뜸은 "쉐마 이스라엘"(Shema Israel)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쉐마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아비의 소리(Voice of father)를 듣는 것과, 아비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삶의 현장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개역개정)

이 시대의 흐름을 보라.

가정에서 "아비의 소리"가 힘을 잃은 지 오래되었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도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는 가능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아비의 소리와 그렇게 울려퍼지는 (소리 속의)메시지를 사랑하는 것이 첫째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a)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 여기에서 먼저되어야 할 사실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본시 한 가지"다. 먼저라는 표현은 "으뜸"을 뜻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슈아께서는 또다시 "으뜸"인 사실을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신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써.
  • 곧 쉐마 이스라엘(Shema Israel)로 이루어지는 "한 분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에 해당되고,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의 의"에 해당한다.
  • 내가 사랑받는 자라면, 능히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은 소중한 고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이웃도 소중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확증(certification)하는 결정적인 일이 된다. 그러기에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내 몸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시 된다.



허나 본시 자신의 아비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비의 소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아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조차 싫어서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체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현실 속에서. 아비를 사랑하는게 쉽지 않음을 오늘날의 자녀들은 여실히 잘 보여준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부모된 분들이시여. 그런 자녀의 모습을 두려워하지 말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저 살펴만 보라.
서투른 행동에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잔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살포시 살포시 바라보라.
그 자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음이 여러분들의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런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는 얼마나 밉고 원망이 되겠는가?

그래서 아비의 소리가 있고 그 소리로 인하여 역사가 펼쳐지는 그 순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된 자,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녀"에게만 허락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쉐마 이스라엘,
의 숨겨진 가르침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에게 해당된다.
그런 자녀만이 능히 지켜 나갈 수 있는 계명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나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구약성경은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계명이고,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롬11:28.새번역)

※ "사랑을 받는"의 의미는 "이미(already)"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 신약성경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된 계명이다.


예슈아의 십자가 보혈을 체험한 기억을 떠 올려보라.

그 순간 "자신이 사랑받고 있구나. 나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바뀌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자신의 주머니가 가난할 지라도, 재물을 나눌 수 있고 (마음이 가난한)부자들에게도 능히 베풀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지 않는다.

오로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 그대로를 삶에서 실천하는 이들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늘의 별을 따주세요"라는 식의 허무맹랑한 요구조차도 기쁘게 순종한다. 그래서 이런 이들을 바라보던 세상은 고백한다.

"가난한 자가 부자를 위로해?"
"맞은 자가 때린 자를 용서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저들은 가능하게 하는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자들이다."


신약의 "복음"(예슈아; Yeshuah)을 영접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회복한 (하나님의)자녀는
구약의 "복음"(예슈아; Yeshua)을 영접함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고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내가 사랑받는 자"라는 것, "나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삶 전체를 바꿔버린다.

공부하는 것을 포기했던 자녀가, 스스로 기쁘게 공부할 수 있는 자로 바뀐다.
부모에게 대들던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공경하는 자로 바뀐다.
세상을 두려워하던 자녀가, 세상을 담대하게 바라보면서 능히 극복해 나가는 자로 바뀐다.
질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자녀가, 질병의 고통보다 더 큰 평강 속에서 예슈아께 고백하게 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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