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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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11:16) selmaala.blogspot.kr   A replica of The Table of Shewbread was part of the Old Testament Tabernacle  display last weekend at the Selma Pilgrimage. Tabernacle Ministries of Mobile  brought the exhibit to Selma. "Shewbread" or "showbread" means "bread of the face"  or set out before the face and presence of God. 그는 진설병(빵)에 관하여 말하고자 했을까? 교회는 성도 우리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각각의 성도가 거룩한 자로 거듭날 때, 성도들의 공동체, 곧 교회(공동체)는 거룩한 곳이 된다. 하지만 거룩과 상관없는 삶을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살아간다면? 교회(공동체)는 두말 할 것 없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다. 교회(공동체)는 이렇듯 성도 한 두명, 또는 목회자나 은사자 한 분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곳이라 칭함을 받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거룩할 때, 거룩한 공동체라 칭함을 얻게 될 것이다. 고로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서, 더불어서 행동함으로, 서로 조화(harmony)를 만들며 서로간 균형(balance)를 맞춰 나가는 것 을 통해 형성되는 곳이 교회(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오늘날의 교회(공동체)를 겨냥하여 말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이렇듯 오늘 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친숙한 삶까지도 예리하고 세세하게...

거짓말 한 자는 상금을 받고 진실을 말한 자는 벌을 받다? 무엇이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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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한 자는 상금을 받고 진실을 말한 자는 벌을 받다? 무엇이 잘못일까? 이솝 우화의 이야기 중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정글북의 한 장면 거짓말을 하는 이와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 두 사람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원숭이의 나라를 지나쳐 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원숭이 왕은 이 두 사람을 초청하게 된다. 그리고는 두 여행자에게 자신과 자기 신하에 대해 평가해 주길 부탁한다. 그러자 거짓말쟁이는 "전하, 전하께서는 가장 훌륭하며 위대한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만천하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신하들에 대해 말하기를 "어느 면모로 보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라고 말했다. 원숭이 왕은 기뻐하면서, 거짓말쟁이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거짓말하는 자가 거짓말을 하고도 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사실을 이야기하면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전하는 멋진 원숭이고, 신하들도 역시 멋진 원숭이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 왕은 몹시 화를 내며, 그를 당장 끌고 가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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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두 사람이 있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말에 동문서답격으로 대한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pixabay 우리가 "대화를 한다"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으로 오인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열심히 열변을 토하듯 말하고 그 자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다.  이럴 경우 서로간에 대화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부모의 의중을 자녀는 대화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의 행동은 필경 동문서답격이 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용어로 다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입장"(처지)이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배려"를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고 한다. Put yourself in other's shoes! 易地思之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동일한 배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왜 "입장 바꿔 생각하기"란 배려의 모습을 각 사람들이 품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는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 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용어를 곁들인다면, 서로 다른 "차원"을 같은 차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 각자의 신령한 말들을 하겠지만, 이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꽹과리의 울림과 같을 뿐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b)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 곧 역지사지의 마음은 "사랑"하는...

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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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필자는 자라면서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업을 들으며 그에 맞춰 공부를 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그리고 대학 4년으로 끝 마치려다가 이에 조금 더 공부하기로 결심하고서 대학원 석사 과정 3년, 박사 과정 3.5년으로 도합 약 23년(22.5년)이다. 23년간 공부를 했다. 그렇기에 이즈음에서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걸까?"라는 단순한 질문 하나 정도는 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전기(Electricity)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삼위일체(Trinity)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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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속성에는 함께 자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그것은 양(positive)과 음(negative)의 성질이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9)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아브라함이 이르되......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5~26) 그런데 무지한 작업자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두 성질을 하나되게 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저항(load; 짐, 고난)을 설치하지 않을 경우 무서운 일이 초래된다. youtube <관련 영상>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히브리의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 자료:  남편과 아내의 히브리어에 숨겨진 구원의 이야기… ) 남편(אישׁ; eesh)과 아내(אשה; eeshah)의 히브리 표현 속에는 불을 의미하는 "אשׁ”(esh)가 각각 들어 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야훼 하나님"(Yah; יה)이 함께 하지 않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 두 개의 불이 그 가정에 존재하게 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가장 강력한 불"을 뜻한다. 지혜로운 작업자 혹은 마땅히 해야 할 상식을 지키는 자는 다르다. 전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두 성질을 하나되게 하기에 앞서 "중간"에 저항(load; 짐, 고난)을 끼워 넣는다. 그랬더니 안전한 전기 회로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기의 두 성질은 그저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잔잔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해 ...

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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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생활이 불확실한 시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오늘날의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어야만 할까? 두려우면 오금이 저려온다. 손과 발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홀로 서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섭게 생긴 존재가 나를 해하기 위해 달려온다. 그 순간 나는 도망가고자 하는데, 내 몸은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설령 움직인다 할지라도, 손과 발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약하게만 동작한다." 여러분. 실감나시나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의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두려움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중을 두렵게 하는 내용"을 듣거나 읽었을 경우, 삶의 소망은 오히려 사그러든다. 심지어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 (앞선 내용처럼) 움직임이 더욱 둔해지고 둔해져서 결국엔 삶 속에서 주저 앉게 된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그 존재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시키는 데로 순순히 따라하는 "종"(slave) 또는 "좀비"(Zombie)같은 자가 된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자신을 바쳐 복종하면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면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면 의롭게 될 것입니다.(롬6:16.현대인의 성경)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상실된 자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저 "누군가가 명령하는 데로"만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

내 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자, 점진적으로 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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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자, 점진적으로 변하는 자 "노다메 칸타빌레".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다. 그 중에서 여주인공 노다메의 방 안 풍경은 매우 인상깊었다.  <노다메 칸타빌레 중에서> 이 방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No! 남자 주인공 치아끼의 반응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초 깨끗한 곳에서 살던 자에게 곧바로 이처럼 지저분한 방을 주면서 살라고 하면, 어느 누가 살 수 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도망칠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깨끗하고 상쾌한 공간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램이요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집안의 깨끗함"은 결정된다. 이를 성경적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집안의 청결도가 결정된다. 믿음의 분량이 모두가 다르다면 모든 가정의 청결도 또한 천차만별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 그 자체다. 그런데 깨끗한 방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쓰레기를 옮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도 본인 스스로가. 목이 말라 생수를 하나 사왔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신 후 빈 pet 병을  방 구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놓아 두었다. 솔직히 그냥 방치하듯 버렸다.  그치만 그의 인식은 "방은 여전히 깨끗해"라는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몇 시간 또는 몇 일이 지나 배가 고파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먹고 난 라면찌꺼기와 빈 컵은 컴퓨터 옆에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그의 인식은 "여전히 방은 깨끗해"라고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이런 식으로 적은 량이지만 매일 매일 아주 조금씩 주변에 쓰레기를 더하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그는 "지저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