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어떤 삶일까?




|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명령이 어떠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기에, 맹목적으로 감사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저는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요'라고 말한다. 


이같은 사실이 언뜻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당신은 왜 감사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과 '당신의 경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답변이 궁색하다.


'성경이 감사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보트나 노예에게 지시를 내리고자 작성된 글이 아니다. 명령을 액면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그 명령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와는 상관없이) 의미없는 행동들만을 즐비하게 해 대는 그런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명령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서, 스스로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사려깊은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는 자녀를 둔 부모의 모습과도 같다.


부모가 큰 아이에게 '너는 동생을 잘 챙여야 한다'라고 명령조로 말했다고 하자. 이는 아무런 생각없이 동생을 그저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명령의 본질은 동생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본질을 이해하면, '어떻게 하는 게 동생을 챙기는 것'인지 스스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매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릴 뿐이다. 이내 그런 순간들이 싫고 짜증나게 되면서 동생을 챙기는 일조차 방관하거나 거부해 버린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공동체)는 상가 3층에 위치한다. 상가라는 특성상 주변을 지나는 행인들이 무척많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주변은 지저분해진다. 온갖 헤아려 나누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각종 쓰레기들이며 옳지 못한 행동들을 일삼는 사람들까지 상가 주변으로 모여든다.


상가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약 6~7년 전부터 교회(공동체)가 상가를 관리하기로 협의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관리자로 세워졌다. 상가 관리소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나 이해를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기도를 했다. 


"주차장을 비롯해 상가 주변 전체를 청소하면 어떻겠니?"


라는 물음이 내 생각 속에 임하였다. 나는 별다른 의미를 알진 못했지만, 봉사라는 의미에서 청소만큼 좋은 접근은 또없겠다 싶어 흔쾌히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했던 마음과 다르게 각종 예상치 못한 쓰레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또한 상가 내 점포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형태가 여러 차례 안내를 해 주더라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이다. 급기야 분노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도를 하면서 주(主)님께 나는 따지기 시작했다. 매우 불편한 마음을 소유한 채로.

주께선 내 불평을 한참이나 들으시더니 이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나를 만나러 오는 이들에게, 내가 깨끗한 곳을 준비해 주고 싶은데."

"네가 대신해서 준비해 줄 수 있겠니?"


아~ 나는 주께서 청소를 제안했을 때, 이는 마치 업무적인 의뢰로만 이해했었다.

상가 관리라는 업무를 잘함으로써 남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게 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라고만 이해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과 함께 내 명성이 쌓이면서 상가 또한 지역 내의 핫플레이스(hot-place)로 변모하게 될 줄로만 이해했었다.


하지만 주님의 그 뜻은 달랐다.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그들 모두에게 깨끗한 곳을 마련해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상가를 방문하든 상가 3층의 교회(공동체)를 방문하든 구분하지 않고,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깨끗한 장소를 준비해 줌으로써 방문자들의 마음에 기쁨을 선사하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이는 업무가 아니었다. 나의 이해가 그릇된 것이다. 주님의 제안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너무 서툴렀다. 하지만 이내 나에게 깊은 깨달음이 왔다. 더욱 명확해진 이해가 얻어진 것이다. 이로써 왜 청소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청소하면 되겠는지를 명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예슈아를 찾아 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교회(공동체)가 위치해 있는 그런 상가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세상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그런 기쁨을 선사하기 위한 예슈아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순간들이었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그리고 어떻게 청소하면 되겠는지에 대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마련한 장소라면 어느 정도의 청결이 필요'할지를 생각해 보니, 내가 원하는 만큼 그들에게 준비해 주면 되겠다 싶으니 청소하는 내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졌다.


청소는 별것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단순히 금전적으로 그에 합당한 보수만 받으면 되는 그런 업무의 하나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일을 할 수 없는 혹은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을 만나면 즐거울 수 있다. 이는 그러한 상황조건 때문에 업무량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놀면서 보수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깨달음이 임하고 나자 나는 바뀌었다. 보수를 받지 않지만 누구보다 청소일에 성실히 임했다. 청소하기 힘든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질지라도 상관없이 청소를 했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주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분의 뜻을 이뤄드릴 수 있는 기회가, 다름아닌 내게 허락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청소를 열심히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니, 청소는 단순한 노동의 의미를 넘어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뜻을 나를 통해 이뤄드릴 수 있음이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가치를 이해해 버린 이상, 청소는 노동이 아니라 (소위)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하는 금광인 셈이다.


그러자 청소를 하는 중에 내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게 되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청소지만, 관리 소장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지만, 내겐 내 삶에 기쁨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어 버렸다.


상가 청소가 장래 맞이하게 될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를 깨닫게 되니, 청소하는 그 순간 순간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안에 솟아나는 그 기쁨을 막을 이는 없다고 여길 만큼, 그 기쁨은 어느 누가 주는 게 아니다. 주님의 뜻하신 바와 함께 하는 그런 삶에서 피어나는 기쁨이다.


그러니 감사할 수 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소하는 내내 감사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겠는가? 심지어 취객이 토해낸 오물이나 배설물을 치우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게서 피어나는 기쁨은 멈추지 않았다.


"너는 깨끗한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자와 세상 어느 누구도 치우지 못하는 더러운 곳을 치우는 자 중에 어느 누가 더 영적 영향력을 많이 갖는지 아느냐?"


"주님, 잘 모르겠는데요."


"세상 누구도 깨끗게 할 수 없던 그 죄를, 오직 예슈아만이 깨끗게 하였던 그 사실을 기억해 보라."


"아~ 그렇군요. 깨끗한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기 보다는, 깨끗하게 치우는 이가 더 놀라운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겠군요. 이는 예슈아의 모습 그 자체를 실제로 본받아 살아내는 것이군요."


이젠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왜?

기뻐할 수 있는 그 근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주께서 허락하신 내 삶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주님의 의도를 찾았기 때문에,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기에 자연스레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나름 고통스런 삶을 허락하신 주님을 원망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명령이 맬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계명이 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의 삶 속에 숨겨져 있던 주님의 의도를 찾지 못한 채 불평불만을 쏟아내는데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입술로는 감사를 실천할지라도 그 마음은 매일같이 메말라 갈 것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이는 내면의 곳간이 텅 빈 자다. 그런 곳간에서 어찌 감사할 수 있는 인심이 나올 수 있겠는가?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 또한 단순하다.


주께서 허락하신 나의 삶에 (불평하기 보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파헤쳐 보라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마13:44)





세상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값진 보화가 자신의 삶 속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자신의 삶을 성실히 임해보라. 상가 청소인들 어떠리요 가난하면 어떠하리요.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그 생각을 갖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주님이 당신의 삶 속에 숨겨놓은 그 주님의 의도를 찾아보라. 그리고 주님의 그 의도를 매일같이 이뤄드리도록 노력해 보라.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기쁨이 당신의 내면 속 곳간을 차고 넘치도록 채울지니, 당신의 입술은 당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고백'을 열어보일 것이다.


그리고는 또다시 감사하게 될 것이다.


무거운 멍에가 아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가벼운 멍에를 주신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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