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를 사용하는 자에게 참된 복이 있다.

선교사님들이 오지로 선교를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이 


한 손에는 복음과 다른 한 손에는 의약품, 그리고 인식을 새롭게 바꿔 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선교사님들 역시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들고 오셨다.

그때 세워진 학교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요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 등이다.





왜 그들은 오지의 땅에 교육 프로그램을 가져온 것일까?


오지의 땅은 온갖 샤머니즘에 의해 정신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그저 '이미 정해진 것' 또는 '운명'(예정설)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소위 한 번 종(노예)으로 태어난 자는 죽을 때까지 종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고,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평생 양반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신(창조주)의 의도라는 것이다. 신의 의도를 벗어나면 끔찍한 하늘의 벌(천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태생 신분을 평생토록 지켜 나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지어준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의 눈에 비치는 그와 같은 모습은 '저주에 빠진 노예의 삶' 그 자체다.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의문을 품지 못'한 채 평생을 수긍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게 저주의 삶인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이 땅에 왜 태어난 것일까?'

'나란 존재는 어떤 가치 또는 어떤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은 내가 누굴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릴 수 있는데, 왜 나는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양반들과 그 시대적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는 백성들이 이같은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이를 위해 행한 가장 큰 것은 '종놈들에겐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노예는 무식해야 한다. 정치가 시민들을 상대로 우민화 정책을 펼치는 것과 같다.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영원한 자유을 얻으리라 by 프레드릭 더글라스



누군가 시키면 '입 닥치고 해'라는 식의 강압적 지도가 가능해야만 정치는 편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 돼지처럼 먹고 마실 수 있는 편안한 삶 만을 보장해 줄테니, 어떤 정치를 펼치든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게 유능한 정치인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의 기회를 말살해 버리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거나 혹은 제공한다 할지라도 지배층의 요구에 부합된 그런 노동을 할 수 있게끔 특정한 사상과 사실만을 주입시키는 주입식 교육만을 제공하려 한다. 그리고는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교육의 현장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가족'(생명의 말씀사; pp108)이라는 책을 통해 자녀 훈육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 훈육은 항상 이해에 근거하며, 합리적인 이유와 설명을 토대로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자녀 역시 오지에 사는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현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바꿔주고자 하는 게 부모된 도리요 선교사님들의 사명이다. 이런 점에서 부모와 선교사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바람을 다스리는 소년(2009)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만들게 될 것인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사고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생각과 행동들이 '그릇되다'는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영접)할 수 있기 위해, 부모의 강요에 의한 수긍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그릇됨을 인지하고 이를 뉘우침으로써 다시는 옛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일이 없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re-born)나게 하는 게 부모요 선교사님들의 사명인 것이다.


  •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롬6:6.새번역)


예슈아께서 주입식 교육을 펼치지 않으시고 강제로 수긍하게 끔 이끄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요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를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자가 됨으로써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자신은 어떤 현재를 골라야 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케 하려 하심이 예슈아의 본 모습이다.


이는 자유의지를 지닌 자, 곧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세대에서만 요구될 수 있는 모습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은 인간의 타락을 의도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스스로 아름답고 복된 미래를 지향하는 성숙한 자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진 그런 온유한 자가 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창조주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자녀에게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leb; Torah)인 셈이다.





매우 위험한 일을 할 경우에는 군인과 같은 상명하복의 명령체계가 필요하다. 말하는 대로 듣고 그대로 행하는 모습은 생명에 위협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거의 없는 그런 곳에서는 교육의 모습이 달라야 하리라. 비록 시간적으로 더디겠지만 자녀 스스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리라. 숱한 실패와 그 안의 교훈을 발판으로 자신의 모습을 개선해 나가는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들이 보장될 때, 자녀는 이해를 근거로 자신의 그릇된 삶을 돌이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같은 힘은 부모가 주는 게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이 주신 복은 '스스로 행하는 자' 곧 자유의지를 사용할 줄 아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a)


가장 귀하고 복된 곳을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신 예슈아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 그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오늘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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