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오해] 신앙인이 돈을 많이 벌면 생기는 특별한 일...


우리의 행실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본이 되게 하라'(마5:16)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하라'(마6:16)는 말씀이 있다.

대부분의 설교자 분들은 이 두 말씀을 들어서 사용하지 않으려 하신다. 두 말씀이 서로간에 너무나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용해야 할 경우가 있다면, 한 말씀만을 인용하고 그에 맞는 교훈을 나눌 뿐 두 말씀을 함께 인용하는 경우는 40 평생 설교를 들어 보았지만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딸 아이가 씻고 나오면서, '몸이 이렇게 개운한데,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지'라고 말하면서 덧붙이기를 '옷을 새로 갈아입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러던 아이가 얼마 전, 2박 3일 일정의 집회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새벽까지 집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세면을 하는 것조차도 피곤할 정도로 예배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늦은 밤에 샤워를 하는 것도 어렵고 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드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옷 한 벌로 2박 3일을 버티고 왔다면서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물어 보았다.

"얼마 전, 집회를 다녀왔을 때에는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고 말했던 너가 오늘은 옷을 갈아입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구나"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말을 하는데, 어느 것이 너의 진짜 마음이야?"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두 말씀은 예슈아 한 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런데 자신의 말이 자신을 대적하는 상황이 될 줄 모르고 예슈아는 말씀하셨던 것일까?

우리 자신들이 다 이해를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예슈아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는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 사도 바울의 말을 잠시 나눠보길 바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중략)...
(고전14:2)

그리고 연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고전14:3)

방언과 예언은 모두 신령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방언과 예언의 매우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형편을 잘 알았는지 사도 바울을 summary를 톡톡하게 해 준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4)

더욱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방언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것인 반면 예언은 타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논란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지적했던 마5장과 6장의 두 구절 속에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위 예언이라는 부분은 타인을 위한 것이기에, 타인의 믿음의 수준과 상관없이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어야 한다. 반대로 방언이라 함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기에 타인은 전혀 느낄 필요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 느끼고 만족하면 되는 부분이다.


음식을 먹었다.

내 아내의 음식이다. 나는 이 음식이 참으로 맛있다고 느낀다. 그럴 때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나를 비난할 순 없다. 그들도 그럴 가치를 느끼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내가 멀 상관하겠어?"
라는 말로 모두들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 삶의 소소한 부분이다. 그래서 아내 음식에 대한 나의 감성은 지극히 자유 그 자체이며 더 나아가서는 방종의 수준까지 이른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나의 이같은 반응에 감동이 되었는지 아내가 갑자기 식당을 열고 싶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맛있는 식사를 먹게끔 해주고 싶단다. 이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정말 내 아내의 음식이 맛있다고 많은 이들도 인정할까?'
하는 의심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왜 그런 걱정을 해야 하지? 바로 앞전까지는 '지상 최고의 음식이다'라는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 아첨을 아내에게 했던 나인데,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아내의 음식을 나 혼자만 맛보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이들이 맛봐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가를 받고서 진행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고 타인들 또한 인정할 수 있는 음식 솜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슈아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우리의 착한 행실을 타인들이 보게 하여, 본이 되게 하라'는 것은 사실 나의 행함 또는 나의 삶이 이웃 내지는 직장 동료 등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내 이웃에게 다가갈 때, 또는 내 동료에게 다가갈 때 그들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서 다가가는 게 아니다. 그들과 차이가 없는 존재로서 다가간다. 그래서 그들이 예상하는 삶의 방식과 나의 삶의 방식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관하다.

그런 중에 그들은 삶이 무기력하다. 소망도 없다. 그저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해서 죽지 못해 산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
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나 라는 이의 모습은 다르다. 다른 이들은 자기 일조차 회피하여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급급한데,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해 주겠다고 나서기 때문이다.

내가 상류층의 엘리트라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니다. 그들과 같은 부류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나를 통해서 보게 된다.

"당신은 나와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일은 물론이고 타인의 일까지 서슴없이 도맡아 할 수 있나요? 그럴 경우 억울한 게 정상인데, 그런데도 당신은 오히려 즐거워 하고 있어요. 일을 더 많이 하고 오히려 억울할 것 같은 당신이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에겐 무엇이 있나요? 당신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길래 당신에게 그런 힘이 있나요" 알려주세요"

만일 내가 그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소위 국회의원이었다고 해 보자.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그들의 일을 도맡아 한다 할지라도 되돌아 오는 평가는 냉혹하기만 할 것이다.

"선거철이 돌아 왔구먼. 그려. 수고했수다. 내가 표 잘 찍어 줄께"
삶의 부류가 다른 이에게 돌아오는 화답은 이렇게 냉혹하다. 상류 사람이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삶의 모습이라는 게 도움을 받은 이들의 대답이다.

하지만 그들처럼 가난하고 그들처럼 무능력하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업무 안에서 너무나 다른 행동을 보인다.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업무 시간에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놀라는 경우가 없는 것과 같다. 그들과 지극히 같은 일, 같은 행동을 하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실로 주변 이들은 놀라워 한다.

그래서 나의 모습을 그들이 하나 둘 씩 본받고자 한다. 비록 처음부터 잘 되는 이는 없겠지만, 하나 둘 씩 나의 모습을 본받으려 노력한다. 그러자 마치 지극히 작은 누룩이 밀가루 포대 전체를 먹어버리는 것처럼, 내 직장이 변한다. 직장이 있는 그 일대의 지역이 변화된다.

우리는 이것을 부흥의 역사라고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언제든지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필자도 그런 마음이다. 아멘.


이제는 마태복음 6장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6:1)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기 때문에, 마5장을 예언의 경우로 접근하여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방언의 경우로 접근해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직장에서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잠시 여유가 생겼다. 그때 책상 위로 성경책을 올려 놓고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나가던 이사님이 다가오더니

"자네 눈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동료들은 보이지 않고, 그저 성경책만 보이는가?"
라고 핀잔을 놓고 간다. 물론 회사에서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내 업무를 깔끔하게 마무리 했으니, 내가 내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사님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내가 성경을 읽고, 업무 시간에 혼자 복도에 나가 조용히 기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내 자유다. 그러나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없다면, 그럴 때에는 묵과될 수 있는 나만의 자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변에는 정신없이 바쁜 이들 뿐이다. 어느 누구 하나 도움을 제안했을 때, 거절할 만한 이들은 하나도 없어 보일 만큼 바쁜 상황이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 출근해 있다는 것은 회사의 유익을 위해 정해진 시간이지 나의 유익을 쫓아 기도나 성경책을 읽기 위해 출근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의 유익은 당연히 나의 여유를 쪼개어 도움이 필요한 직장 동료를 도와주는 것이지않겠는가? 나의 여유를 쪼개고 쪼개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충분한 도움을 준 다음에, 나만의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해 한적한 복도를 찾는다면 어느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싶다.

신앙인이 혼자만의 유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거나 기도 내지는 금식'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타인에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적 비밀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만 발전이 있을 뿐, 그 내면에서의 발전이 주변 이웃에게 나눠지는 부분이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굳이 타인의 눈이 많이 있는 그런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게 예슈아의 의도였지 않겠느냐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금식을 했다는 인식을 주지 않도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하게 씻어'(마6:17)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금식하는 일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 금식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고 해서, 모든 금식에 대해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누군가 금식하면서 까지 그의 고통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순간도 있겠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다'는 식의 극단적인 선택을 고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신앙 생활하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많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통변이 되지 않는 방언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을 보았고 기도를 열심히 했던 나의 신앙생활이 실제 직장의 삶에서는 동료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동료에게 그저 세상 사람들 중의 한 사람처럼 여겨질 바에야 차라리 '성경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을 멈춰버려라'고 말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내실을 견고하게 하는 일들은 빛과 소금처럼 세상에 일말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많은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장에 가서 물건값 하나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다면, 내가 배운 수학적 지식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일들은 이와 같다고 하겠다.


  • 내 수중에 금덩이가 많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기근이 찾아 왔을 때, 음식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금덩이는 그저 돌맹이에 불가한 것과도 같다.


여러분.
금덩이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훗날 어려움이 왔을 때 그 금덩이를 긴요한 곳,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사용하기 위함이지 않겠는지요?

아무리 많은 금덩이를 가졌다 할지라도 어려움이 다가오자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렇게 많은 금덩이를 소유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싶습니다. 자신의 안위에만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소량이면 충분할 것을, 왜 주님은 그렇게 많은 금덩이를 소유하게끔 하셨을까 하고 의문이 듭니다.


나의 재산이란 아마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산이 많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굳이 남들에게 자랑할 필요가 없겠죠.
그러나 타인을 위해 기부하고 후원하는 등의 일들을 한다면 재산이 많다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흠이 되지 않을 줄로 생각합니다. 재산이 많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어떤 분이든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재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필요하신 분들은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느 누가 그의 풍부한 재력을 폄하하려 하겠는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금기시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는 '재력'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눔을 통해 이러한 의문 내지는 고민거리를 한 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그런 삶, 그리고 그런 자유가 여러분과 제게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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