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성찬의 그 의미를 새기는 자
누가복음 22장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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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은
예슈아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하여 지금의 우리는 지켜행한다. 그러면서 '도대체 성찬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대개는 '예슈아께서 명령하셨잖아요'라는 말로 답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슈아의 피와 살을 먹는 의식이기에 중요합니다'라고 답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더 다양한 답변들을 주실 수 있는 분들도 계실테지만, 흔히들 들을 수 있는 질문은 앞선 사례들이지 않나 싶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 '예슈아는 예슈아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란 것일까?'
우리가 잘 아는 바로는 '아버지의 뜻대로만 살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아들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성찬을 행하라고 하셨을까? 물론 이같은 질문이 어떤 분들에겐 의미없는 질문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지난 40여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내용이 성찬의 의미였다고 여기는 필자에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힘쓰셨던 독립투사 분들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당부를 했을까?
"내가 죽거든 너희는 아빠의 모든 행한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것을 꼭 간직하거라"
라고 말할 텐데,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가 행한 일을 곧이 곧대로 행하라는 의미에서 남기는 말일까?
사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가 무슨 사리사욕을 챙기려 하겠는가? 그런 이가 남아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길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말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필자의 개인적 의견에서 추론해 보건데
"가족을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만 했던 그 본질을 너는 알기를 원한다."
"그 본질은 아빠의 목숨 보다도 소중한 것이란다."
"너는 어느 시대에 어떤 삶을 살지라도 그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단다."
"이는 아빠의 목숨과 바꿔서 너에게 남겨주는 유일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드는 마음은 이와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찬에 대한 의미가 기존의 오랜 신앙 생활 속에서 알고 있던 의미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단순히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눅22장에서 보면, 예슈아는 먼저 자신의 손에 있는 떡을 나누어 제자들에게도 먹을 수 있게끔 배려하셨다. 자신의 손에 있는 포도주를 나누어 제자들도 마실 수 있게끔 배려하셨다.
| 그 상황에서 제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분명히 예슈아, 곧 가장 큰 자가 작은 자들에게 배려를 했기에 그 큰 배려를 몸소 받은 제자들은 어떤 행동을 취했던가?
눅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가장 크신 분에게 배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큰 자라고 다툰다. 이때 예슈아는 말씀하신다.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우리가 익히 아는 단순한 사실, 곧 큰 자는 앉아서 먹고 시중 드는 자는 서 있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예슈아는 그런 상식과 정반대의 사실이 진리인 것이라 말씀하신다. 가장 큰 자이신 예슈아는 자신의 크심을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입증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엿볼 수 있겠다.
성경을 보는 그 시각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 이방인의 시각으로 볼 경우,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보는 그 시각을 성령님이 주시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볼 경우, 정반대로 왜곡되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성찬의 의미는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큰 자가 보이신 그 모습을 기억하여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해야 한다는데 주안점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의 행동만을 모방하는 것은 결단코 의미가 없다. 그가 왜 그와 같은 행동, 곧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먼저 떡을 나눠주고, 포도주를 나눠주셨는지' 등의 행동들을 하셨는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 하나에서 추론할 수 있겠다.
예슈아는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서 항상 '자신의 것을 나누어 먼저 타인이 먹고 마실 수 있게 배려'하셨다. 누군가를 위해 먼저 배려하는 그 모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예슈아께서 성찬이 있는 세데르에서 행하신 모든 행동은 다름아닌 '율법 그 자체'를 행하신 것이다. 예슈아께서 늘 강조하셨던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모두를 지켜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 율법이 재정된 그 본질을 지키시겠다는 그 의미다.
가령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는 것에 대해 금하는 법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횡당보도에 빨간 불일 때에는 건너지 않고, 파란 불일 때 건너야 한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이가 횡단보도를 미처 다 건너기 전에 파란 불에서 빨간 불로 바뀌어 버렸다. 그럼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법이 금했으니,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이 과연 '무단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지 마세요'라는 규칙의 본질을 지켜 행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법이 제정되었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법이 필요한 것이다. 일련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서, 어느덧 로보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함이 아니란 뜻이다. 법은 생명이 위태로운 자 앞에서 능히 법의 계명을 어길 수 있어야 한다는 그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때 계명은 어겼지만, 법의 본질은 그를 죄인이라 판단하기 않는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2:27)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12:5)
성찬의 본질은 예슈아께서 행했기 때문에, 그 성찬의식은 거룩한 것이고 그때 먹는 떡과 포도주는 성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일 수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예슈아의 행하심 모두는 율법을 제정하시고 그 율법을 우리에게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 야훼 하나님의 그 마음'leb; Torah'을 이해하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a)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하였더라면, 더 나은 음식과 더 좋은 포도주를 고르는 방법까지 설명하셨을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슈아는 그런 것들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셨다. 먹고 마시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마6:31~32a)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24:38)
먹고 마시는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떡이라 표현된 마짜(누룩 없는 빵)을 선정하신 이유는 예슈아께서 그 빵을 비유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비유는 본질이 없을 때에만 의미를 갖고, 본질이 나타나면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본질이다.
가령 '그 장군의 위엄은 마치 사자를 보는 것 같아'라고 했을 때, 사자의 위엄은 비유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자를 찾아 헤매는 것은 간접적인 체험에서는 유익하겠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무익하다. 왜냐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듯이, 그 장군을 실제로 만나면 비유로 삼았던 사자의 위엄이란 생각은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 성찬에 본질을 두신 의미는 바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그것만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의 참된 마음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아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자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조각내어 '작은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그 상황은 경건의 위세를 삼는 그런 순간이 아니라고 본다. 소위 성찬의 의식을 행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여기는 순간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설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찬의 순간을 보라.
스스로를 노예라고 생각하면서 성도들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성찬의 집기들이 다소 큰 이유를 보면,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공손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대하듯 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는 누가 누구를 악하다고 폄하하려는 설명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다시금 재고해 볼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그러한 부분을 명확히 재고하여 올바르게 회복할 경우 우리들의 가려졌던 시야들이 밝히 보여질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24:30~31)
사랑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으로 예슈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기념하면서 성찬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으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단연코 예슈아 자신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려는 그 삶'이었지 않았겠는가?
오늘의 우리는 율법을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온전하게 행하는 것인지를 성찬의 의식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중에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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