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jealous)하는 하나님? 정말로? 에이 아닌거 같은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y)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5:9)
성경 속 표현을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표현되어 있다. 사실 질투라는 뉘앙스는 그리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부정적 요소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의문을 품어보자는 취지다. 야훼 하나님에게서 부정적인 요소 혹은 악한 자의 모습이 있어야 할까? 가령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럼 사랑이신 야훼 하나님은 시기하지 않는 분이시다. 필자가 의문을 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질투"라는 뉘앙스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하리라 믿는다.
"질투"라는 의미로 해석된 jealousy의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ardor, zeal, jealousy"의 의미를 갖는 qinah(קנאה)로 표현되어 있다. 즉 qinah에는 jealousy 하나의 의미만 담겨 있지 않고, ardor와 zeal의 의미가 더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각의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 ardor
- Great warmth of feeling; fervor; passion.
- Spirit.
- Intense heat.
✔ zeal
- The fervor or tireless devotion for a person, cause, or ideal and determination in its furtherance; diligent enthusiasm; powerful interest.
✔ jealousy
- A state of suspicious guarding towards a spouse, lover etc., from fears of infidelity.
- A resentment towards someone for a perceived advantage or superiority they hold.
- Envy towards another's possessions
- A close concern for someone or something, solicitude, vigilance.
ardor와 zeal이란 의미에는
연인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애정어린 감정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는 반면, jealousy에는 분수를 넘어선 과도한 탐욕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
| 왜 히브리어 qinah(קִנְאָה)는 서로 극도의 상반된 두 개념을 소유하고 있을까?
먼저 간단한 질문을 한 번 해 보자.
'온 우주 만물의 소유주는 누구일까?'하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뻔하다. 창조주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 소유주시다. 그럼
자기 소유물인데, 그것을 차지하고자 혈안이 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아니리라 본다. 이런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심지어 논리적이지 못한 억지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로 상반된 개념이지만, 이 개념들을 시간의 흐름에 끼워 맞춰 넣는 식으로 "어떤 실제 상황"을 묘사하고 이렇게
묘사된 상황을
상형문자인
히브리 단어 qinah에
옮겨 담어
보자.
| 한 남자가 있다.
그가 나이가 차매 한 여인을 흠모하게 되었고
그 마음이 벅차오를 만큼 커지면서 이내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전심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많은 재산을 얻었다. 그래서 아내가 원하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들을 능히 해 줄 수 있는 그런 부유한 자가 되었다.
그는 늘어나는 재산이 기뻤던 것이 아니다.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의 눈에는 자신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것을 환한 미소로 기뻐하며 즐겁게 누리는 그런 아내만 보일 뿐이다.
| 이 순간까지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은 ardor와 zeal로 표현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헌데 어느 순간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다.
무엇을 누리기에 기뻐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기뻐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은 너무도 조용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시선을 따라 남편은 자신의 시선을 옮겨 보았다.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는 젊고 용모가 뛰어난 노예가 서 있었다. 그 젊은 노예는 기쁘게 일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다른 노예들에게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까지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있다.
남편은 순간 앞이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환하게 웃으면서 일하는 젊은 노예와 그를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만이 보일 뿐.
'남편인 자신에게서 젊은 노예에게로 아내의 마음이 옮겨가 버렸다'는 그 자체에 남편은 너무나 화가 났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그래서 남편은 더욱 가슴이 아팠으며,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너무나 큰 화가 났다.
"아내의 마음이 옮겨간 이유는 저 젊은 노예 녀석 때문이야. 그럼 그 녀석만 죽이면 될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된다. 젊은 노예의 죽음을 알고서, 더욱 슬퍼할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일을 행한 것으로 남편을 원망하게 될 것이고 그럼 자신은 더욱 비참해진다.
"그럼 아내와 젊은 노예를 한꺼번에 죽여버릴까?"
멀쩡하게 주인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예에게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런 아내를 죽이는 것은 지극히 상식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계획도 그의 마음 속에서 거부당하고 만다. 그는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노예에게로 옮겨가 버린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겠는지에 대해 혈안이 되어 있다.
| 이처럼 아내의 마음을 되찾고자 전심으로 노력하는 그 남편의 마음은 jealousy로 표현함이 매우 자연스러우리라.
이야기가 너무 진부하다거나 뻔해 보인다고 여길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수 천년 동안 우리들이 읽고 또 읽고 했던 그 대목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보디발과 그의 아내, 그리고 젊은 요셉의 상황이다.
youtube |
| 보디발은 세계 최강의 국가에서 "최고위직 인사급 죄수"를 감찰하고 감시하는 자다.
그런 자는 본시 "매우 빠른 상황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촉이 빠른 인간"이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를 보자.
회사 내에서 남들 몰래 커플을 맺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이 어느 때가 되면 공식적으로 커플인 것을 선언한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커플 선언 소식을 듣는 동료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커플은 의아해서 동료들에게 되묻는다.
"저희가 커플된 것에 마음이 안 드시나요?"
그럼 동료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은 두 분이 사귄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 말에 두 커플이 더욱 놀랜다.
"아니 어떻게요?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다 숨겼었는데?"
의아해 하는 그 질문에 동료는 짧고 간단하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를 쳐다보는 눈빛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쳐다보는 눈빛은 달라요. 그 눈빛은 숨길 수 없어요"
보디발의 아내 역시 모든 사실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눈빛 만큼은 절대로 숨길 수가 없다는게 자연의 이치다. 보디발의 아내는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겠지만, 눈치 100단의 보디발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체면도 있고, 역시나 아내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예보다 못한 보디발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것도 원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아내와 젊은 노예를 함께 죽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사한 일이 생겨났다.
다른 노예들의 입에서 소문이 나기 전에 어떤 큰 사건이 터졌다. 젊은 노예, 요셉이 자신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소식이 자신의 아내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것이다.
| 그 순간 보디발은 너무나 기뻤다.
겁탈 소식이 아니라, 아내의 마음이 요셉에게서 떠났음을 직시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처리할 수 없던 매듭을 이제는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 않는가? 아내의 앞에서 요셉을 감춰버리고 싶었는데,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보디발은 두 말하지 않고 요셉을 "지하 감옥"으로 보내버렸다.
Bible Fun For Kids |
물론 요셉을 죽인다면, 아내가 슬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는게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쯤은 오래 전부터 고민해 오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에 의해서 알려졌었더라면...'
보디발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때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내와 요셉"을 함께 죽여야 한다. 보디발은 이 상황을 가장 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외의 한 수가 작용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은 간단하게 종료되었다.
☞ 요셉의 비하인드 스토리
요셉을 아내의 시선에서 감출 수 있게 되었고, 보디발은 아내의 마음을 다시금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 우리는 성경 통독을 매우 즐겨하고 신앙의 큰 맥락 중 하나라고 여긴다.
그러던 중 우리는 보디발이라는 이름에 친숙할 수 있게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의 부정했던 부분도 익히 알게 되었다.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시작된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졌을 법한 상황 혹은 역사적 사실들에는 왜 관심을 쏟지 못했을까? 그토록 좋아하는 인물, 요셉이 극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인데.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오늘의 "의문스러워 한 행동"은 좋은 이해를 얻게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질투하는 하나님"은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 이해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그 시대적 사건들 속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다양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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