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수준이 높은 이들을 향한 주님의 강력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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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경륜이 높(아 보이)은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인자한 미소와 당당하게 행하는 섬김의 모습들은 누가 보더라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한다.
"저 장로(또는 집사, 권사, 성도)님은 반드시 휴거 되실거야"
"저 분은 꼭 천국에 들어가실 거야"
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부러운 마음에 그분들을 바라본다. '부러운 마음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지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나도 저분들처럼 신앙의 경륜이 높아지기를 바래야지'
라는 힘찬 결단을 한다.
그럼 생각해 보자.
성경은 신앙의 경륜이 낮은 이들에게 권면과 위로와 덕을 세우기 위해 기록된 글을까?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말을 바꿔서 '신앙 경륜이 낮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글을까?'라고 되묻는다면, 이는 그릇된 말이다.
성경은 신앙적 경륜이 충분히 높다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향해서 매우 무섭게 경고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로 이같은 부분들을 '신앙의 경륜이 낮은 이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알려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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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기억해 보자.
비유의 모든 내용이 전개되었을 때,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이'가 누구인지 짚어 낼 수 있겠는가?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18:23~34(개역한글)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중략)...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중략)...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중략)...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여기에는 3명의 주된 인물이 등장한다. 왕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그리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형편을 가엾게 여기고서 그의 빚을 과감하게 탕감해 준다.
- 일만 달란트의 빚이 일순간에 사라진 순간이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이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보고서 몹시 분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때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큰 반전이 일어난다.
왕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행한 그 악한 소식을 듣고 탕감받았던 모든 빚을 다시 원상복귀 시켜버린다.
- 사라졌던 일만 달란트의 빚이 일순간 다시 생겨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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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인물은 누구이겠는가?
백 데나리온과 일만 달란트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을까?
※ 데나리온(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100일 간의 품삯이 된다.
달란트(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단위로 바뀌었는데,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고 이는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일만 달란트는 1십 6만년의 품삯에 해당하니, 이는 노동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금액이다. (참고자료: https://pasteve.com/money-of-bible)
비교 자체가 안 되는 크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과 백 데나리온을 탕감받는 것에 비해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한 은혜를 체험한 것을 뜻한다. 그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간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그 간증을 듣는 이들 또한 가슴에 벅찬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은혜 받은 이를 향해 '축복하노라, 축복하노라'라는 말로 노래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부터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았던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진다. 그의 삶은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주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여기게 된다. 자신을 존경하듯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눈치채게 된 그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앙 수준이 높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게 된다. 그리고는 교회(공동체)의 지체들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상담을 받게 되고 스스럼 없이 권면과 훈계 등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개역개정)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하며 기뻐히 전하는 반면,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는 그의 눈빛이 바뀐다. 그 순간이 되면 그는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 짓는 전능자'의 신분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기 보다는 '처벌'을 내린다.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중략)...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28~30.개역한글)
우리는 생각한다.
"빚진 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라고. 당연한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할 필요없음을 강조한다. 그렇다. 빚을 진 자에게서 원금과 이자(원리금)를 상환 받겠다는 것을 옳은 일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빚 또는 죄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한 곳은 없다. 그래서 예슈아의 핏값은 우리들이 짊어져야 했던 빚 또는 죄 값을 위해 대신 지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마7:12.개역개정)
내가 이미 받은 은혜가 있는데, 그 은혜가 내 것인 것을 확증(certification)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절차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마18:32~33.개역한글)
절차를 통과해야 함은 '마땅히 행할 바'에 해당한다. 왕(주인; Lord)은 이같은 절차를 행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과 동시에 '시험'도 함께 주신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은혜라는 것을 체험해 본 적도 없는 연약한 지체들과 달리 매 순간 은혜를 입었다며 간증하는 분들에게 해당되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은혜라는 것은 '받는 것'만으로 완성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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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시험'을 치루는 것을 통해 확증할 수 있는 결과(삶의 모습; 증거)가 나타날 때 완성된다(complete)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다름아닌 '율법의 이치'다. 613개의 조항 모두를 지켜야만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게 아니라, '받은 은혜를 삶에서 흘려 보낼 때' 율법은 완성된다.
따라서 은혜를 받는데에만 집중하는 신앙의 자세는 매우 위험하다 할 수 있다.
은혜는 받는 것이지만, 고인 물이 되어선 안 된다. 정한 시간이 지나도록 주변 이웃들에게 흘려보내지 아니한 은혜는 썩어서 구더기들이 넘쳐나는 악취나는 만나(manna. 출16:20)가 되어 버린다.
|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은혜를 완성해야 함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 시험을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그 사실을 확증해야 하기 때문에, 시험을 회피해선 안 된다. 확증은 내게서 은혜를 받은 자가 주님 앞에서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16:7.개역개정)
그래서 내게 빚진 자, 곧 그 원수에게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마지막 때 우리는 심판자 되신 주님 앞에 모두가 죄인의 신분으로써 마땅히 서야 한다. 어떤 죄인에게는 그를 향해 변호하는 이들이 있고 어떤 죄인에게는 그를 향해 참소하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신 이유는 바로 '나를 향해 변호해 주는 이웃들'을 찾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하루를 살아갈 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야 한다.
나에게 나를 위해 기꺼이 변호해 줄 수 있는 좋은 이웃들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개역개정)
오늘 따라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그런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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