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눈에 비친 에덴의 동산 너머 그 세상의 풍경
합리적 의심 또는 논리적 비판(분석)은 자신이 이미 잘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부족한 것을 보게 하고 이로써 더욱 분명하고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다. 즉 새로운 차원으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우리에게 얻어지는 깨달음이란 사려깊은 고민 등을 쉬지않고 행할 때, 생활 속에서 불현듯 만나는 무언가로 인하여 얻게 된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었고, 뉴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봄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힘을 보았던 것처럼. 오늘의 나눔은 이같은 측면에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좋은 동기가 될 줄로 믿는다.
아담과 그의 아내 '여자'는 에덴의 동산에서 살면서 동산 너머의 풍경은 볼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거나 혹은 끝을 알 수 없는 울창한 숲으로 가려져 있었을까?
만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면, 이같은 논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둘레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 놓는다면, 어느 누가 가까이 접근하려 하겠는가? 이게 아니라면 벌거벗은 상황일진데 매우 크고 단단한 가시덩쿨이라도 그 나무의 주변에 둘러 진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불가능하진 않겠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전하는 기본 전제가 있다. 그것은
'강압적인 힘으로 순종을 이끌어 내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라는 사실이다.
통치자는 백성을 그들의 소유로부터 몰아내려고학대를 통해그들의 상속 재산을 취하지 말며
...(중략)...
내 백성이각각 자기 소유를 떠나 흩어지지 아니하게할지니라.
...(중략)...
내 백성이각각 자기 소유를 떠나 흩어지지 아니하게할지니라.
(겔46:18.흠정역)
그래서 먼저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수긍)'할 수 있도록 헌신이나 배려 등의 수고를 베풀게 한 후 상대가 기쁨에 넘쳐 스스로 순종하게끔 이끌어낸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개역개정)
이같은 의도 가운데 아담과 그의 아내는 창조되어 에덴의 동산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능히 눈으로 볼 수 있는 동산 너머의 세상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대해서 아담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담의 영적 상황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겐 이같은 상황들이 항상 궁금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가정에서 아이들과 성경을 읽으며 가정 예배를 드려는 순간, 읽고 있던 성경에서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가 들어가는 땅은 더러워진 땅이다.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역겨운 일을 하여 그 땅을 더럽혔다.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그 땅을 더러운 것으로 가득 채웠다.'
(스9:11.쉬운성경)
| 그렇다. 에덴의 동산 너머에 있는 그 세상은 몹시도 더러운 땅이다.
그러나 더러운 그 땅은 그들이 반드시 '들어가야 할 땅'이다. 다른 마땅한 곳이 또 있다면 모를까, 이들에겐 선택이 없다. 더럽지만 기필코 들어가야만 하는 땅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버릴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버려선 안 되는 땅이기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온통 그 땅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3:16a.개역개정)
아담은 택함받았다. 창조주 야훼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사랑하셨던 그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세상은 더러운 땅이지만,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 곳이다. 더러운 것이 결코 더럽지 않은 곳이었다.
| 왜?
죄가 율법 있기 전(前)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롬5:13.개역개정)
그래서 누군가는 그 땅에 들어가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이라 말할 수 있어야만 했다. 더럽다는 것을 인식해야 더러운 것을 없애고, 더럽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죄의 속성 한 가지를 알아보고 가자.
홈플러스에 가면 값지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득 있다. 적당한 물건을 고르고 그 물건에 맞는 값을 지불함으로써 물건을 구매했다.
이 과정에서 죄를 지은 바는 없다.하지만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로써 물건을 몰래 훔치는) 절도죄와 같은 죄성이 홈플러스 안에 또는 세상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죄를 범하지 않았을 뿐, 죄는 있었다. 죄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우리와 늘 함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할 수가 없다. 사실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럼 죄를 없애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떤 의미일까? 삶에서 어떻게 해야만 죄를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쇼핑 상태로 되돌아 가보자.
절도를 유발하는 죄는 있었지만 쇼핑하는 중에 절도에 해당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면 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여전히 머물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물건을 훔치는 그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행위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죄는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누군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드러난 죄의 일부를 향해 절도죄다'라고 이름을 법을 근거로 하여 명명한다.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2:19b.흠정역)
이로써 모습이 드러나 버린 죄(의 일부분; 또는 죄의 지체)는 그 존재가 명확해졌다. 죄의 실체가 정확해진 상황에서 그 죄의 무게(삯)를 정확하게 측량하는게 가능하게 되었고 얼마의 합당한 처벌(속제물)이 죄의 삯을 가름할 수 있는지를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대속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마찬가지다.
아담이 에덴의 동산에 기거하면서 세상에는 나가지 않았던 당시 그 세상에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고 여길 수도 없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죄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죄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고 드러난 죄의 모습에 정확한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다.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그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며
(창2:5.흠정역)
사실 양심이 말라버린 상황에선 죄된 행동이 드러난들 죄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게 된다.
무능하고 새 옷만을 좋아하며 사치를 일(상의 생활로)삼는 임금이 있었다. 어느날 세계 제일의 옷을 만들 수 있다며 임금님에게 접근한 사기꾼(재단사)들은 마음씨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고 마음이 악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감을 사용한다면서 허공에서 옷을 만드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신하와 임금님은 자신이 악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게 두려운 나머지 멋진 옷을 만들고 있다며 오히려 재단사들을 칭찬해 주었다. 옷이 다 만들어지고 임금은 그 옷을 입고서 거리행차를 단행하는데, 이 모습을 본 시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임금님의 벌거벗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이 악한 사람이라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거벗은 임금님과 신하들, 그리고 허다한 시민들 모두는 서로 환호하며 큰 소리로 임금님의 (보이지 않는) 옷을 칭송했다.
<벌거벗은 임금님 중에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는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선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서로간에 칭송하며 격려하듯 즐긴다. 그런데 누군가 한 사람이 그같은 상황을 깨트려 버린다.
자신의 마음씨가 혹은 외모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평가되든 상관하지 않(으며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자, 그런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 ^^* "
아담은 어린 아이처럼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만의 평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자신을 바라보는 세인들의 이목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에 첫 발을 내딛었다.
세인. "당신은 못 보던 사람인데, 누굽니까?"
아담. "저는 아담이라는 사람인데, 이모조모 해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세인. "머라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어떻게 죄라는 겁니까?"
아담. "양심(Leb; the heart of father, Torah)에 비추어 보십시오. 그건 죄입니다."
세인. "........"
"사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도 오래 전부터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어. 저 말이 사실이지 않을까?"
양심이 사라져 버린 혹은 두려움이 양심을 '밟아 누르고 있'(Yebusi, יְבוּסִי; jebus. 어원 bus)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양심이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양심이 세워져 있어야 할 자리를 죄(에 대한 두려움)가 발로 밟고 있는 상황이다.
※ Yebusi(יְבוּסִי); jebus. word origin from 'Yebus'(יְבוּס; an early name of jerusalem). word origin from 'bus'(בּוּס; to tread down, trample)
예루살렘(Yebus)은
이방인(Yebusi)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Yebusi)들에게
'밟히리라'
(bus)
(눅21:24b.개역개정)
tread down(짓밟다), trample(1. 짓밟다, 밟아 뭉개다 2. 남의 감정·권리 등을 짓밟다) |
| 부정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것들로 인하여 압제되고 있는 그 땅을 회복시켜야 할 자,
아담.
그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자 명령이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 다산하고
- 번성하여
-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창1:28.흠정역)
에덴의 동산에 서 있는 아담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그의 아내는 그를 돕기 위해 무엇을 바라보며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
그녀의 유용(??)한 도움을 받은 아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세상을 향해 힘찬 첫발을 내딛지 않았을까?
마치 의도된 계획에 따라 자신의 겉옷을 보디발의 아내에게 벗어준 뒤, 기쁜 마음으로 감옥에 걸어들어 갔던 요셉의 그 모습처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