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세대들이여. 예루살렘은 왜 이방인에게 밟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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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21:24b.개역개정)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곳이다. 그래서 당연히 택함받은 백성, 곧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백성이 거하는 곳에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곳을 '이스라엘의 백성과 그들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 뜬끔없다 할 만한 질문을 한 번 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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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자'는 과연 누구일까?
야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이들은 과연 누구일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 아니면 이방인? 과연 누구일까?
이같은 궁금증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3:8.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Gentile)에 대해선 조건을 제시하셨는데, 믿음있는 이방인들에 한해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택하기 보다 훨씬 이전에 계획되었다. 창세전에 이미 계획되신 일을 성경(성령)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7:2b.개역개정)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개역개정)
'땅의(or 땅에 속한)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이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택함받은 족속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이스라엘이라 칭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이삭의 후손에는 두 족속이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3.개역개정)
이삭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는 자가 등장한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그 표현 속에는 어떤 족속이 포함될 수 있겠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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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앞서 거론했던 것처럼)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이방인 족속도 함께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또 다른 표현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개역개정)
처럼 '한 새 사람'을 의미한다.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데, 주께서 임하실 때에는 이같은 생각 또는 사상을 폐하여 버리신다. 그리고 '이 둘', 곧 이스라엘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이방인을 한 사람으로 지어서 서로 화평하게 하실 것이다. 그 예시가 '나오미의 며느리, 룻'의 모습이다.
| 룻은 본시 모압여인이다.
그 심령에 야훼 하나님이 없던 족속이다.
그래서 그 심령은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심령이 이방의 마음에 의해 '짓밟힌' 상황 또는 이방의 마음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랬던 그녀의 심령에 변화가 생겨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1:16b.개역개정)
진정한 변화가 심령에서 일어나면, 그의 삶은 반드시 변한다. 룻의 심령 변화는 지극히 가난한 자의 삶(고난)이 찾아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담대함을 준다. 그리고 계명을 어기는 일을 행한다. 이스라엘의 딸 나오미가 일러주는 것을 따라 이방인의 딸 룻은 과감하게 계명을 어긴다.
룻3:1~5(개역개정)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이방 여자가 이스라엘 남자의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야훼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남자가 야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31:16.개역개정)
- 브올의 행음한 사건. 민25:1~9.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스10:10.개역개정)
룻의 이같은 짓은 어찌 룻을 두렵게 하지 않았겠는가? 계명을 어기는 그 일을 행하고서 두려움에 떨지 않을 자가 어디 있었겠는가? 룻은 야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에 대해 심히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룻3:11a.개역개정)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두려운 상황을 일순간에 종식시켜 버리는 극적인 반전이 뒤따른다.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1:3b.개역개정)
현숙한 여인에게 요구되는 믿음의 행위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상식(common-sense)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2:15.개역개정)
우리는 상식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들이 있는데, 성경은 상식을 무척 귀한 행위로 본다.
야훼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과 범죄(sin)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경우에만 일어나는 역사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12:5.개역개정)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준비하느라 일을 행한다. 이는 마땅히 행할 의무이기에 상식이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이게도 그같이 행함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어겨 버렸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안식일을 범했지만, 4번째 계명을 어겼지만 이것을 문제로 삼지 않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죄가 없다.
고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도 그와 같이 말씀하신다.
| 이것은 극적인 반전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 참소하는 자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참소할 것이다.
"저 자는 어떤 어떤 계명들을 언제 어디에서 어겼습니다."
라고. 명실상부하리 만큼 우리가 계명을 어겼던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해 나간다. 그러나 그때
"계명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죄가 아니다."
라는 예슈아의 변론이 우리와 함께 한다. 이처럼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왜 인정해 줄까?
그것은 룻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죄로 문제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개역개정)
나오미로부터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들었다. 그렇게 들은 바를 토대로 룻은 계명을 어겼다. 바보같은 순종이지만, 기업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룻에 있지 않고 나오미에게 있음을 룻은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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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ah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던 심령.
그래서 이방의 생각에 의해 짓밟히던 심령이
Torah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Torah(율법; 교훈, 가르침)를 따라 계명(법)을 어기는 상황 속으로 담대히 들어간다.
그랬더니 그곳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는 이스라엘은 이같은 일을 하지 못한다.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장자의 마음이다. 몹시도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부모의 말을 고지곧대로 듣고 행하는 장자의 모습.
하지만 이방인은 다르다. 장자가 아닌 차남의 생각은 유도리가 있다.
부모의 진정한 본의를 파악함으로써, 부모의 규율을 스스로 어긴다.
그러나 규율을 어김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기에, 그같은 행위는 오히려 부모를 흡족하게 한다.
고지곧대로 행하는 자의 모습 안에서 부모는 흡족한 기쁨을 얻지 못하는 반면, 규율을 어겼지만 부모의 본의를 지켜 나간 유도리 있는 행동은 능히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 예루살렘의 옛 이름은 여부스(Yebus; יְבוּס)였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대상11:4a.개역개정)
그 땅은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짓밟히(bus; בּוּס)고 있었다.
'여부스 땅의 주민들'(Yebusi, יְבוּסִי; jebus)이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대상11:4b.개역개정)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삿1:21.개역개정)
그런데 그 마음 속에 예슈아를 영접함으로써 이방(육)의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영의 생각에 다스림을 받겠다는 자들이 생겨난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서 싹을 틔우게 될 텃밭은 심령이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막4:14~15.개역개정)
그래서 씨앗이 뿌려질 심령은 땅으로 비유되고, 그 땅은 이방인의 심령을 의미한다.
이방인(Yebusi; 육의 생각)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짓밟히(bus)는 그 심령은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땅, 곧 길(road)이 되어 버린다. 생명이 없는 땅이다.
유대인은 고지식하기 때문에 길을 만들지 못한다. 숱한 들짐승들이 산이나 들판을 다닐지라도 길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걸음은 결코 길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유도리가 있어 자유(롭게 자신의)의지를 펼치는 이방인은 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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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일은 오로지 이방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길이 다하는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길의 끝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기다리고 있다. 성전으로 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걸어가는 길이 된다.
악행을 행하기 위해 걷던 길
'악한 마음'(Yebusi; jebus, 이방인)에'짓밟히'(bus)던 길이
이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생명이신 예슈아를 만나는 거룩한 곳(예루살렘; Yebus)이 된다.
길을 찾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니, 이제는 (이전의 경멸하고 조롱하던 것과 다르게) 서로 화평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한쪽은 율법을 아는 자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진정한 예배의 곳으로 향하는) 길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 둘이 서로 다투고 싸울 때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개역개정)
하지만 둘이 화평하게 되니, 절대로 들어갈 수 없던 그곳이 드러났다. 그 길이 훤히 들어난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개역개정)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27:51a.개역개정)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둘로 나뉜(마27:51)다.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과 그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무리들로.
※ 둘로 나뉘는 것과 하나 됨이 동시에 여러번 나타난다. 이로써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를 함께 나눠보자면 다음과 같겠다고 여길 수 있다.
휘장에 의해 지성소와 그 외 지역은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는 진정한 예배의 장소로 나아갈 수 없는 것으로써 야훼 하나님과 인간 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예슈아에 의해 서로 화합된 곧 휘장이 완성되면 그 휘장은 스스로 소멸하게 되면서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을 드러나게 한다.
휘장이 소멸되는 과정 중에서 둘로 찢어지는데, 이는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둘로 나뉘는 것으로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예배에 참여할 자와 참여하지 못하는 무리로 나뉨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믿는 이방인이 반드시 필요한 그 이유는 바로 '성전으로 인도되는 그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믿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야훼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오직
화평케 하는 것
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중략)...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민16:1~2.개역개정)
최근 정치에 참여하는 믿는 이들의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로의 정치 참여다.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운명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삶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가 '우민화 정책'에 의해서 우민이 되어 버린 국가다.
하지만 정치 활동을 하는 중에 더더욱 분별하여 나아가야 할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당을 짓고 분열을 일삼는 짓'에 집착할 경우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유1:19.개역개정)
하늘 왕국은 자유민주주의일까? 아니면 인민민주주의일까? 혹은 자본주의일까? 아니면 사회주의일까?
사회주의 사상의 기틀이라 말할 수 있는 '막시즘'(마르크스 주의)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액면적으로는 독일 사람으로서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사회주의 혁명가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생각 속에서 피어난 것이 '사회주의'사상이었고,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회를 이끈 사회체제는 공산주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키부츠'라는 사실을 아는가?
※ 키부르(kibbutz):
이스라엘의 농업 공동체. 개인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소비 활동과 교육을 공동으로 함.
일간 신문에 게재된 사실 하나를 함께 나눠 보자. (오해를 없애기 위해 원문의 내용 그대로를 인용하고자 한다.)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레닌의 혈통은 최근까지 논란거리였다. 소비에트 혁명 초기 핵심세력의 85%가 유대계였고, 유대계 자본이 혁명의 뒷돈을 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아버지' 레닌마저 유대계였다는 것은 반(反)유대 정서가 강한 러시아에선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레닌도 그 사실을 숨겼다. 1932년 레닌 가족이 레닌의 유대 혈통을 인정한 편지가 최근 공개됐다고 한다. 가족들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닌의 외할아버지가 유대인이었고 레닌도 유대인을 대단하게 생각했다"며 반(反)유대 정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출처 : 조선일보
정치 활동은 좋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활동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요구되는 시대다. 당신의 정치적 성향에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마음, 곧 '육의 생각'(Yebusi; 이방인)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이방의 생각에 짓밟히고 있는 그 마음(땅)을 이제는 주님께 드려야 할 때다. 예슈아께서 핏값으로 사시는 그 땅은 다름아닌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야 할 타작마당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대상21:25.개역개정)
이는 창세전의 비밀, 곧 이방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전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대상21:18.개역개정)
야훼 하나님의 천사가 다윗에게 일러준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야훼 하나님의 뜻이 예언을 통하여 다윗에게 전해졌다. 야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구별할 줄 아는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다윗은 '여부스 사람'(Yebusi) '오르난의 타작마당'(Yebus)에 제단을 쌓아야 함이 옳다는 것을 분별했다.
여러분.
분별하십시오.
우리의 거룩한 것은 거룩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땅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셔야 합니다.
| 온실 속에서 자라고 꽃을 피는 그 식물이
건강이라는 귀중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 쓰레기 장에서 한 줄기의 싹이 올라오고, 그 줄기 끝에서 힘겹게 꽃 한 송이를 피워올린 그 식물에게 건강이 있겠습니까?
건강이란,
온실에서의 개화가 아닙니다.
쓰레기장, 온갖 더러움이 난무한 그곳에서의 개화에 건강(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사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야훼 하나님의 군대는 인간의 군대가 아닙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하심을 따라 담대히 나아가는 그런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정치에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길 원하신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행하십시오.
- 내가 아무리 많은 실적이 있다 할지라도, 예슈아께서 인정하지 않는 실적은 모두 헛수고입니다.
- 내가 아무리 많은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물쇠가 인정하지 않는 열쇠들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들음이 있다 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다면 모두가 의미없는 들음들 뿐입니다.
편리한 삶이 아닌,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긍정이 아닌, 십자가의 삶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무법함은 방종을 주지만, 율법은 참 자유를 줍니다.
오냐 오냐하면 버릇이 없어지지만, 훈계와 채찍은 예의바른 자녀를 낳습니다.
좋은 것에서 좋은 것을 보는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하지만 쓰레기들 속에서 귀한 것을 보려 할 때에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런 능력이 깃드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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