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숨겨진 key point를 찾아 나 자신을 축복하라.

이치란 principle로서 원리라고도 불린다. 이는 자연의 섭리 또는 창조의 질서가 운영되는 지혜(wisdom)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이것이 원리를 터득해야 하는 부분이다.

모든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사실, 곧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원리(지혜)를 깨달을 때, 그 원리에 순응(순종)하여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이해'(understanding; 명철)하고 말한다. 원리를 모르면 시험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지혜가 없다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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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모든 시험은, 그리고 삶 속의 모든 문제의 핵심(key point)은 바로 '원리'(priciple; 지혜)에 있다. 이를 다시 설명하자면, '원리로 설명되지 않고, 원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풀이과정은 틀린 답이다'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성경 속 표현으로 옮겨 적으면 '지혜에 순종하여 행하지 않는 생활 속의 모든 행위는 헛된 것이며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창조의 원리' 또는 '창조주의 지혜'를 찾아야 하면 이를 깨달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 애쓰는 대표적인 이들이 있으니, 그들을 학자라고 말한다.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중략)...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단1:3~4.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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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앞에 설 수 있는 이는 흠이 없는 자로서, 학자적인 사고능력과 학식을 갖춘 자여야 한다.
  • 여러분의 자녀가 왕 앞에 능히 설수 있기를 바라신다면, 주입식 교육을 가르치는 그 현장에서 자녀를 빼내시길 강권한다. 그리고 부모가 스스로 판단하여 (자녀가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은) 고난의 순간을 주는 것과 아울러 쉴 수 있는 시간을 적절하게 제공하라. 고난의 순간에서 자녀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애쓸 것이며, 이를 통해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창의력과 사고력을 소유하는 자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고난의 시간을 경험했다면 마땅히 쉴 수 있는 충분한 쉼의 시간을 허락해 줘야 할 것이다.


자연의 섭리요 창조의 질서 가운데 하나인 '공생 관계'를 잠시 나누려 한다.



공생 관계란

'서로간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삶'으로 묶여있는 또는 속박(구속)된 관계(relationship)로서 이같은 관계의 존속 여부에 따라 두 존재에 임하는 각각의 운명도 결정된다. 즉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요 관계의 유지는 생명이다. 이처럼 공생 관계의 특징은 한 쪽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반드시 반대편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마태복음 18장 18절(흠정역)


이 말씀을 근거로 땅과 하늘의 관계를 추론해 볼 수 있으리라. 곧 땅과 하늘은 공생 관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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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공생 관계라는 연결고리 안에 보다 다양한 이해를 접목하면,

  • 절벽의 줄이 끊어지면, 여인의 생명줄로 끊어진다.


  • 땅이 죽으면, 하늘도 죽는다.
  • 땅이 저주를 받으면, 하늘도 저주를 받는다.


  • 땅에 생명이 깃들면, 하늘도 생명이 깃들고
  • 땅이 축복을 받으면, 하늘도 축복을 받는다.


와 같은 의미로 연장하여 이해를 더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해는 또 다른 연장선을 그을 수 있게끔 하는데,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12장 3절(흠정역)

아브라함과 그 외의 모든 족속(열방)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겠다. 단, 여기에서 출발점은 아브라함(이스라엘)이다. 절대로 이방족속(All nations; 열방)이 아니다.

  • 아브라함이 살면, 이방인도 산다.
  • 아브라함이 복을 받으면, 이방인도 복을 받는다.
  • 아브라함이 은혜를 받으면, 이방인도 은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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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아브라함에서 출발하는 그 지점은 매우 작은 점(dot)으로 묘사할 수 있겠고, 아브라함은 산의 정상(apex)으로 나타낼 수 있다. 산 위의 맨 위 정상에 물이 쏟아지면, 그 물은 반드시 아래로 내려간다. 이는 이치다. 만물의 원리다. 이것이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지혜다. 또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예정론이다. 그래서 정상 아래에 있는 부분들은 정상에서 흘러 나오는 그 물을 마실 수 있다.


by Arachnoid



공생 관계는 창조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때, 예정된 삶을 약속받을 수 있다. 언약을 받은 자들의 이같은 삶은 예정론이라는 견해로서 설명될 수 있겠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은 물론이고 믿음의 지체들 조차도 이같은 일을 경험하기 어려운 이유는 왜 일까?


그것은 공생 관계에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를 모르는데 행동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령 어떤 이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으로만 살아가는 개인주의적 삶일 뿐, 연관된 관계성은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모두가 다 (공생 관계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관계성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매우 극단적인 생각만을 한다는 뜻에서 두 주장 모두 같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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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극단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창조주께서도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허락지 않으신 줄로 믿는다. 이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상황을 추론하자면 그것은 두 극단적인 상황들이 적절하게 섞여있는 '조화의 세계'라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와는 공생의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어떤 이와는 관계성이 없는 전혀 무관한 개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가운데 그럼 어떤 이와 공생의 관계가 맺어지고, 어떤 이와 관계성 없는 개별적인 삶을 맺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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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사건'(event)이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일이다. 그 결과 상처를 준 쪽과 상처를 받은 쪽은 '상처를 준 하나의 사건'을 공통 영역으로 삼는 어떤 연관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이 생겨난 것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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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상처는 어떤 경위에서 생겨날 수 있을까?

내 손 바닥이 멀쩡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어느 누가 내 손바닥을 만질 때,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상대의 행동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손 바닥에 (나도 인지하지 못하던) 작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고 하자. 그 손 바닥 위로 옆 사람이 손을 뻗어서 훓고 지나간다. 그 순간 나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하여 내 마음은 매우 불편한 상태로 변하게 된다. 곧 옆 사람을 향해 분노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내 마음의 분노는 그 사람의 행동에 있기 보다는 내 손 바닥에 이미 오래 전부터 박혀 있었던 가시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내게 고통을 주는 직접적인 계기는 옆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내 살 속에 박혀 있는 가시가 주는 자극이다. 

따라서 내 안의 내적 상처 또는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상대와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상처 또는 내면의 죄성에 해당하는 만큼에서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7:12a.개역개정)

여기서 앞 부분의 '남'이란 창12:3에서 거론된 야훼 하나님이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뒷 부분의 '남'은 내게 고통을 느끼게 해준 사람 또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다시 마7:12의 말씀을 해석해 보자.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저주를 하면, 야훼 하나님은
나를
저주할 것이고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축복을 하면, 야훼 하나님은
나를
축복할 것이다.


따라서

내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야훼 하나님께서는 내 몸 안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같은 연결 고리는 공생 관계로 구속되어 있을 때에만 성립되고, 이때 우리 자신은 어떤 결과를 장래에 맞이하게 되는지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설교자 분들은 설교를 통해 '용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궁극적으로 '용서하는 삶'이 주는 모든 혜택은 (상처 준 사람에게만 있지 않고) 상처를 받은 나를 겨냥하여 준비되고 있다는 뜻이고, 야훼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오직 '나 한 사람'에게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나를 사랑하시는 이가 내개 허락하시는 삶은 가장 좋은 것으로만 베푸시는 삶이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삶에 대해 야훼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드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도 중증근무력증으로 인하여 일어설 힘조차 하나 없고, 소위 우유 한 병을 구입할 몇 천원도 없던 시절에는 야훼 하나님을 원망했었다. 모두가 지난 날을 뒤져보면 같은 사람이요 성정이 같은 자들이다.

허나 삶 속에서 경험한 작은 간증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깨달음이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인도 했을 뿐이다. 그래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 원리'를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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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접하던 초창기엔 무척 어렵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자 무척 쉬운 학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다. 이전의 시각으로 야훼 하나님과 성경을 대하지 말고, 시각을 바꿔보자.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게 가장 좋은 순간(삶)을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여겨보자.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그때에 다니엘은
그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들어가 자기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중략)...
자기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드리더라.
(단6:10.흠정역)

상황과 상관없이, 그같은 상황을 허락하신 이에게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는 '그리스도 예슈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살전5:18)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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