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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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내가 청와대에 가서 뜬금없이 '대통령은 지금 당장 비상국회를 소집하시오'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어느 누가 나의 말에 수긍할 수 있겠고, 나의 말대로 따라 행할 수 있겠는가?
잘 나가는 드라마가 있다. 그 안에서 A남자와 B여자가 아름다운 연인으로 발전할 것처럼 보였는데, 뜬금없이 A와 C가 연인이 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났다. 이럴 경우 시청자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스토리 빈약하다"
는 등의 악평을 듣게 된다. 시청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전개 과정'도 주지 않고, 그저 결론(Final)만 말한다면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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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전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평소 은사적인 모습이 전혀 없었고, 성경에 대해 그리 깊은 조예나 경륜도 없던 내가 기도하는 중에
"너희 교회(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을 향하여,
'이 교회(건물)을 당장 팔아서 OOO 장소에 터를 잡아 새롭게 건축을 하여라'
는 말을 전해라"
는 주님의 음성이 느닷없이 들려왔다고 하자. 그래서 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분들을 모와 놓고 이같이 말했다. 나의 이같은 말에 사려깊게 수긍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열이면 열 모두가 '꿈을 꾸셨군요.'라고 하거나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다소 비난하지 않으려는 듯한 질책섞인 어조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는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게 다시금 다가와 다소곳하게 앉으며
"당신의 말에는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이해(깨달음)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건물을 팔아야 하는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듣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유를 듣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작가가 원하는 마음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하다 보니 수백 페이지로 된 책 몇 권 내지는 몇 십권을 훌쩍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지식의 깊이가 심히 깊고 오묘한다면, 그의 마음이 담긴 '한 마디의 말'을 이해한다는게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게 오히려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그가 남긴 '단 한 마디의 말'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 많은 인생의 시간과 노력 등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듯. 우리가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말씀'(결론; Final)을 한 번 듣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의 모든 생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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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결론을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듣는 것으로 그자리를 떠났던 예전의 모습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개역개정)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아무리 획기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결론'만 말할 경우, 극도의 거부감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거부감이 든다고 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리는 이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거부감이 들지라도 자신의 기질을 절제하면서 그 자리를 인내하여 지키는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막4:34)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단 한 번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없다. 불가능하다. 제자들은 이같은 상황을 대략 3년을 보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그분의 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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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중요해지?'라고 질문을 할손 싶으면그것에 관한 답변은 궁색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의 짧지 않은 글을 통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결론적인 사실'만 전해 듣고자 하는 이는
굳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동행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인생이 아무리 짧다할지라도 결론만을 듣기엔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인생의 저편에서 주님과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으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이 없는 영역을 찾아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을 우리는 지옥이라 부른다.
한편 결론만으로는 이해가 안 되니, 이해를 얻고자 노력하는 이가 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비유로) 말씀하셨나요?'라고 물어야 했다. 그랬더니 이후에 상세한 설명을 해 주시는데, 알고 보니 그 설명을 듣는 데에만 또 다른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보면, 좀더 심오한 단계로의 이해가 궁금해지고, 그러한 궁금증 때문에 또 다른 추가 질문을 하게 되니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지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우리에게는 '끝이 없는 시간', 곧 '영원의 시간'이 있어야만 했다. 이를 간추려 표현하니 '점입가경'이다. 따라서 설명을 해 주시는 이는 자신의 충분한 설명을 듣고자 하는 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 시간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요 주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는 천국에서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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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그저 '연습'(rehearsal)이다.
연습은 무엇을 연습하는 것일까?
rehearsal
1. 리허설, 예행연습
2. 예행연습(과 같은 경험·일)
3. (이미 이야기된 내용의) 반복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holy convocation)로 모일지니
(레23:33~35a)
여기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자주로 보는 단어 '성회'(holy convocation)의 convocation이라는 단어를 잠시 살펴보면,
In Hebrew, the word “convocation” means “miqra”, spoken as “Mik-raw” (Strong’s concordance number 4744). In Hebrew, this word means “rehearsal”. What does the word rehearsal mean? Rehearsal is defined as “the act of practicing in preparation for an event”. The term “miqra” also means to “read and understand” the laws of Elohim (God in English).
이라고 한다. 곧 '장차 반드시 와야한다고 예언된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연습하는 행위'(the act of practicing in preparation for an event)가 성회로 모이는 것이며 그 성회를 이 땅에서 행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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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모두가 필히 죽음을 '만나'(encounting)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의무감에서 절기를 지키던 자는 '우리가 왜 이런 절기를 지켜야 하지?'라는 궁금증을 외면한 채 그저 형식적으로만 절기를 지킨다. '그같은 모임'(convocation)은 성회(holy convocation)이 될 수 없다. 성회로 모이는 자들은 반드시 '비유로 들었던 것'들에 대해서 궁금증을 품고 나와야 한다.
'나는 왜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
'나는 주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주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등의 궁금증을 품고, 반드시 해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
바로 성회로 모이는 그 절기 중에.
주님이 '반드시 나오라고 명하신 그 순간'에 우리는 궁금증을 내놓고 그 분의 충분한 설명을 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이유이며 동행하는 삶의 리허설(rehearsal)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습한 이는 주님이 '반드시 나오라고 정해 놓으신 그 순간', 곧 죽음이 임할 때면 자연스럽게 주님에게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그 질문에 답변을 하는 주님의 설명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다. 주님은 '하찮은 우리의 질문'을 귀하게 여기시면서 우리의 질문에 답변하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의 참 뜻을 알아가게 되니 자연스럽게 주님을 극찬(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삶이 영원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철학자들이 질문하고 그리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색의 시간을 걸쳐 답변을 하는 등의 모습을 두고 우리가 학자들의 모습이라 하는 이유와도 같다. 매우 고지식하면서도 딱딱해 보이는 삶처럼 보이지만, 철학자들은 그 안에서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강한 중독성의 기쁨을 맛보았다.
천국에서는 일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놀고 먹고 지내는 곳이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곳에서는 동행하는 삶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인데, 그 동행은 주님께 질문하고 주님은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인격적인 교제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요16:25.개역개정)
우리는 설교 한 번 듣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데,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마치 믿음의 모습으로 여기려 하는데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결론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충분한 설명을 듣는 기나긴 시간을 할애할 줄 아는 그런 삶을 이 땅에서 연습(rehearsal)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동행하는 삶이요. 장차 영원토록 살아야 하는 저 땅에서 실제로 지켜 행해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법규와 법도를 가르치게 하셨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4:14.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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