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인 나. 인격적인 너. 그리고 합력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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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아는게 (비교하지면) 심히 부족하고 약하다.
반면 어른들은 아는게 많도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없고, 어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른과 아이 모두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모르며, 부분적인 강하고 부분적으로 약하다. 고로 앎과 모름이 조화(harmony)를 이루고 있고, 강함과 약함이 균형(balance)을 이루고 있는게 어른과 아이 할것 없이 모두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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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지도자를 세운다 할지라도 지도자 또한 이러한 harmony와 balance 안에 속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지도자 또는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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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도자도, 어떤 목회자도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앎과 모름의 조화'와 '강함과 약함의 균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서로 협력한다면,
나의 앎으로 상대의 모름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고
나의 모름을 상대의 앎으로 강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삶의 모습(역사)이 바로
- 지도자와 책사의 관계이고,
- 책사와 무사들의 관계이며,
-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라 생각한다. 물론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더 많은 관계성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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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역을 하던 그 사역의 내용에 비중을 두고 싶지는 않다. 다만 특정한 사람에게 모든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보다는, 서로 합력하여 다양한 토론을 거쳐서 의견을 수렴하는 그런 모습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싶다.
성경의 말씀을 입술로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지 말자. 서로 합력하겠다는 마음의 결단 없이 입술로만 하는 것은 '주문과 주술'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다면,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내용이 있는지 경청해야 한다. 이것이 인격적인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시55:1a.개역개정)
상대가 완벽하고 지혜롭기에 경청하는게 아니다. 부족하고 하찮아 보일 지라도, 그의 생각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야훼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분의 인격적인 성품이시다. 고로 이같은 모습, 이같은 야훼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이 교회(공동체)안에서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겉모습으로만 인격적인 관계를 부르짖는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우리가 상대를 그렇게 존중하며 살아야하리라.
내가 하는 말에 그냥 순종해.
이건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다. 노예에게 하는 말이면서 '말 못하는 짐승'에게 하는 처사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입술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야훼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을 이 땅에서 실천해 나가는 삶을 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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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술의 말이 중요하게 여김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자.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벅차지 않을 정도로 변화를 도모해 보자. 오늘의 글을 나누는 필자 조차도 이 부분에서 아주 아주 조금씩 변화를 도모할 뿐이기에, 여러분과 별반 다를바는 없다. 우리 모두가 같다.
단지 오늘부터라도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결단을 해 보자.
- 남자는 여자의 말에, 여자는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남편은 아내의 말에, 아내는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부모는 자녀의 말에, 자녀는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상사는 부하직원의 말에, 부하직원은 상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회사는 노조의 말에, 노조는 회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정부는 국민의 말에, 국민은 정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여당은 야당의 말에, 야당은 여당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의 말에, 못 가진 자는 가진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삶은 너무나 많다.
바꿔 말하면 한꺼번에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함께 실천하기에만 집중해 보자.
그것으로 함께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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