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안의 백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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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covenant)이란 말은

약속(promise)이라는 말과 유사한듯 하면서도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 Covenant는 웹스터 신학 사전 (Webster Theology Dictionary)에 따르면 "의무와 상호 책임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두 진영 간의 공식적인 합의"를 의미하고, Promise는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 또는 하지 말아야 할 의무에 대한 약속입니다.
  • 예로써 Covenant는 '당신의 가족은 내 가족이 되고, 나의 가족은 당신의 가족이 된다'는 결혼과 같은 새롭게 출발하는 관계의 수립을 지향하고 Promise는 '앞으로 지각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는 식의 지켜야 할 의무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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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약속이 미래에 일어날 일과 연결되어 있듯이, 언약 또한 미래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성취될 그 무엇을 언급하는게 아니고 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그 실체를 볼 수 있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아내가 아이를 잉태하는 시점과 출산하는 시점이 다른 것으로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이를 잉태하는 시점은 언약을 체결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는데 반해 아이를 출산하는 시점은 언약이 성취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언약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마법적 창조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인내 또는 연단이 있는 시련(내지는 성화)의 과정이 열매 맺는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연의 섭리 또는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 고로 언약은 3단계의 기간을 담고 있다. 씨가 땅(심령)에 뿌려지는 단계와 씨가 죽어 싹이 나고 자라서 줄기와 잎사귀를 내는 성화의 단계, 그리고 가장 탐스러운 극상품의 열매를 맺는 결실의 단계로 구분지을 수 있겠다. 이같은 구분은 '언약과 열매 맺는 삶'의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만든다. 언약에 속한 자 중에는 열매를 맺는 자와 맺지 못하는 자로 나뉠 수 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제거된다.

☑ 요15:1~2a(흠정역)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니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가지는 그분께서 제거하시고

☑ 히4:1~2(흠정역)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노라.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faith not believe)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



반면 언약에 속한 자로서 열매를 맺는 자는 

열매를 맺는 모든 가지는 깨끗하게 하사 그것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
(요15:2b)

이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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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안에 속한 백성이란

시련의 과정 중에 있는 백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화된 자'(completed state)를 의미하지 않는다. 치유된 자도 아니다. 정결한 자도 아니다. 산 제물이 되기에 합당한 자를 뜻하는 말도 아니다. 심지어 '준비된 자'(stand-by)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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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받은 자 곧 언약에 속한 자는
부족한 자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아는 자들이다. 여전히 상처가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하여 마음의 동요를 겪는 자다. 하지만 이 모든 불완전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신념(faith)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소망'이 있어서, 지금의 힘든 상황에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여전히 일하는 자들이기에 이후에는 반드시 '안식'(shabbat)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다.

  •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줄을 알거니와(히4:6a.흠정역)


  •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 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느니라.(히4:9~10.흠정역)



믿는 이방인들에겐 언약이 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언약이다.

하지만 유대인 곧 이스라엘에게도 성취되지 않은 언약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에 속한 백성으로서 현재 남겨진 자들이다. 이들이 언약에 속한 백성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앞서 논했던 것처럼)완벽하게 채워지지 못한 부분적인 모습을 갖춰야 한다. 즉 밥을 먹는다고 먹었지만 여전히 '영양실족의 상태'(결핍)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은 만나(manna)를 먹었던 백성들이지만, 생명의 빵을 먹진 못했기에 영양실족에 걸렸다.

이러한 결핍은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예슈아를 영접하지 못하였기에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대인은 예슈아를 마음으로 영접한 적이 없다.

그저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권위로 지시했기 때문에, 그 지시에 따라 행하는 족속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수긍되지 않지만, 육신적으로는 무척 무거운 멍에를 잘 감당하고 있다.

허나 마지막 순간에 이들은 (디나의 강간당한 사건처럼) 어떤 계기로 인하여 예슈아를 진실로 영접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접한 그 마음은 예슈아를 메시아로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영접과 마음의 결단이 일어난 후 이들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지시를 무척 기뻐하는 마음으로 지켜 행하게 된다. 이로써 이들 유대인들도 가벼운 멍에를 매는 날이 찾아온다.

이것이 언약에 속한 백성의 모습이다.

우리는 언약에 속한 백성이라고 자청한다.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지 않기를 바란다. 훈련에 들어가 있는 훈련병들이 실수에 집착하여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무익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훈련병에게 있어서 실수는 병가지상사다. 훈련병은 성공을 향해 전진할 뿐, 실수는 교훈을 얻는 거울로만 삼고 마음의 무거운 가책을 지닐 필요는 없다. 그리고 서로가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언약에 속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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