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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믿는 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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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방영된 스카이 캐슬은 상위 1%, 내지는 상위 0.1%에 해당하는 그룹만이 통과할 수 있는 '인생의 관문'을 묘사하였다. 그 인생의 관문은 매우 좁디 좁은 문인데, 그 관문을 통과했던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위 3대째 서울대 의대 출신 가정이 되고자 갖가지 묘책들을 찾아주는 갈등의 구조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부모세대는 특히 엄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미 자신들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특권층의 혜택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쟁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비법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안겨주고 싶어한다. 이같은 잘못된 갈망은 '감정조차 알 수 없는 입시전문 코디네이터'를 만나는 자리까지 인도하게 된다. 대개는 학부모가 코디네이터를 선택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코디네이터가 학부모와 학생을 선택한다. 즉 ' 택함을 받는다 ' ( choose ; bara , ברא ) 는 측면에서 '성경적 입장'을 정확하게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스카이 캐슬은 '서울연고대'를 의미하는 SKY라는 의미 보다는 'Sky castle'로서 '천성'(天城; 천국)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 Biblehub 창세기 1장 1절 코디네이터의 선택은 학부모와 사이에서 맺는'상호 합의'(계약)에 의해 효력을 갖는다. 효력이 발휘되면 그 순간부터 코디네이터는 학생을 전담하여 가르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코디네이터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코디네이터는 명상실을 준비하였고 그곳으로 의기 양양한 학생을 불러온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의도는 학생의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일깨우는데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부분은 '부모의 지나친 관심에 대한 자녀의 분노'를

우리가 분별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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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10 가지의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반드시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10 가지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 행해야만 한다. 십계명은 왜 주셨을까? 그리고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라는 뜻일까? Photo by Nathan Anderson on Unsplash |  우리는 십계명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길 원한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겠으나, 전체를 볼 순 없다. 무엇으로부터 빠져 나오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세히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전체적인 구도를 보라는 뜻이다. 우선 ' 냄비 안의 개구리 '(boiling frog) 비유를 살펴보길 원한다. 한 가지의 만족스런 환경만을 고집할 경우, 그런 삶의 결말은 죽음이다. 자녀에게 칭찬만 했다. 항상 '잘한다'는 말만 했다. 그 자녀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까?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성장하고 만다. 냄비 안의 개구리 비유와 같은 결말을 맺는다. 냄비 안의 개구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환경만 고집하는 것보다 상황이 번갈아 바뀌는 그런 환경을 택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  이번에는 십계명에 이와 같은 지혜로운 시점을 적용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을 2가지 관점으로 나누려 한다. '행하라'(Do it!)라는 부분과 '하지 마라'(Don't do it!)부분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구도를 보자.     1~3 ,            4~5 ,          6~10 Don't do it       Do it       Don't do it '하지 마라'는 부분과 '행하라'는 부분이 번갈아 나타나며 이내 '하지 마라'는 부분으로 다시 상황은 바뀌었다.

요한의 계시록은 요한에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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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자신의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않고 행하신 적이 없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신다고 하셨다.  그럼 과연 몇 명의 선지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일까?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요8:17) 이 사실은 어찌 보면 추상적이다. 좀더 실제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것을 '거울과 거울 사이에 섰을 때, 진실이 드러난다' 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Image and Description Imageload.Co 거울과 거울 사이에 서게 되면, 나의 모습은 가릴 곳 없이 여실히 모두 드러나게 된다. 심지어 그렇게 드러난 실체의 수는 '무한'(the infinite)이다. 무한의 영역은 신(God;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영역이다. 거울과 거울 사이에 서게 되는 그 순간은 다름아닌 야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없는 순간이 된다. 따라서 그때 확인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진실'일 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창1:6) 유대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시각에 의하면 야훼께서 물과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셨고 그 사이엔 공간을 두셨다. 그래서 윗물의 표면과 아랫물의 표면은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게 된다. 그 결과 '위에 있는 것은 아래 있는 것으로 반사되었다'라고 할 수 있거나 또는 '아래의 것은 위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곧 율법이 명하는 두 증인은 바로 창1:6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창1:6] 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다, 그리고 회개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의외의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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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성경 곧 예슈아를 누구에게 증거했을까? 이방인? 우리는 주로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예슈아를 증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으로 들어가 삼 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2(쉬운성경) 바울과 실라가 평소의 습관대로 회당을 찾았다. 즉 바울과 실라의 평소 신앙인의 모습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삶 그 자체였다. Photo by Michael D Beckwith on Unsplash A synagogue is a place of Jewish worship. In addition to housing a sanctuary for services, synagogues often serve as the centerpoint of Jewish life . The word “ synagogue ” is the Greek parallel to the Hebrew term beit knesset , “ house of gathering.” www.chabad.org 유대인의 회당에는 누가 있었을까? 이방인? 아니면 유대인? 그곳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모세의 글(모세오경; Torah)을 읽고 열정적으로 토론하기를 즐거워하는 유대인들의 소굴이 있다면 그곳은 유대인의 회당이다. 바울과 실라 또한 3주간 모세의 글(성경)을 놓고서 다른 유대인들과 열정적인 토론을 했다. 어떤 내용을 토론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행17:3) 바울과 실라는 예슈아라는 이름은 거론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

기억은 우리의 마지막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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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하는 자는 모두 가 기억을 갖습니다. 기억(Memory) 이란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확할 수 있는 유일한 ' 삶의 열매들 '입니다. Photo by Ryan Parker on Unsplash ​ 그렇기에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는 말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저승에서는 아름다운 기억을 더 이상 수확할 수도 없고,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이 수확한 그 기억만을 가지고 영원토록 살아야 합니다. 만일 좋은 기억을 수확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더 이상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기억을 좀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열린 곳을 말하라 하면, 그곳은 이 땅에서의 삶이 있을 때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만 기회가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들을 모두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마음 속에 응어리로 간직할 것만 같던 기억들을, 이제는 선한 기억으로 모두 바꿔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죽을 때, 세상에 속한 어느 것 하나 소지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허나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 땅에서 일궈 놓고 수확한 삶의 기억들 뿐입니다. 그 기억들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모두 바꾸신 이들은 영원토록 아름다운 기억을 간증으로 나누면서, 기쁨에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반면 응어리 만을 간직하신 이들은, 영원토록 그 응어리를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한 영생이 어떤 면모를 가지게 될지 예상이 되시죠? 바로 지옥 그 자체입니다. 한편 아름다운 기억이 적고 아름답지 못한 기억이 많은 이가 있을 것이며, 아름다운 기억이 아름답지 못한 기억보다 많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 두 부류에게 있어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기

주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 왜 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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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두 사람이 샘물(water) 앞에 서 있다. 한 사람은 심하게 목마른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다. 두 사람에게 각각 물을 한 잔씩 떠 주었다. 물을 마신 각각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물이 꿀처럼 달다고 느끼는 이는 어느 쪽일까? Photo by Thomas Ensley on Unsplash 그저 상식 그 자체다. Photo by Carolyn V on Unsplash 성경책 펼쳐 있고 그 앞에 역시 두 사람이 서 있다. 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가 되어 버려서 몹시도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다. 다른 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칭송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다. 두 사람 모두 성경 말씀을 처음부터 읽어내려 간다. 자신이 읽고 있는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 이는 누구일까? 성경 말씀에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그렇기에 말씀들이 꿀처럼 달다고 느낄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성경 말씀이 기록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오늘 이 순간 이 말씀이 어떤 의도에서 기록된 말씀인지 풍성한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내 삶에 고난을 안겨 주시면서 '너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Photo by Luis Galvez on Unsplash "왜 나에게 이토록 힘든 고통을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삶. 일석이조의 원리를 실천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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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흠정역; KJV)을 보면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시니라. 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한 줄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늘상 해 보는 그런 보편적인 질문을 떠나서 좀더 색다른 의문을 가질 순 없을까? 지구는 어떤 형상으로서 물질계(Material, Physics)다. 그래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Photo by Caleb Woods on Unsplash 반면 하늘은 어떤 것일까? 하늘은 비물질계(Nonmaterial, non-Physics)다. 그래서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다. Photo by Val Vesa on Unsplash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분별할 수 있는 우리 감각기관의 대표적인 예로 구분할 때 이렇다. 학생이 찰흙으로 원숭이형상의 조각을 만들고서 책상 위에 놓고서 "나는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안의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건 올바른 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정상적인 표현이라면  "나는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라고만 해야 한다. 이게 정상이다.  이같은 생각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이해하려 한다면, 성경의 첫 구절은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창1:1을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하는 이는 이방인에서도, 유대인들 가운데에서도 없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듯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의 이해 또는 창1:1을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에서 오해가 있는건 아닐까? 오늘의 나눔은 이렇게 시작해 보기로 하자. 우리 앞에 백지 도화지가 한 장 앞에 놓여 있다. pixabay (BELOW ALL) 백지 도화지를 보고 우리는 어떤 의미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