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아사셀을 위하여......
히브리어/헬라어 직역 성경본을 참조한다.
사도행전 13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1. 그때 안티옼 교회에 예언자들과 선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르나바와 니게르라 불리는 쉼온과 구린인 루키오와 헤롣 영주와 함께 자란 메나헴과 샤울이다.
2. 그들이 야훼(여호와)를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샤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시킬 일이 있다."
3. 그때 그들은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보내었다.
4. 그래서 정녕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보내어져서 셀뤼키아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퀴프로스로 갔다.
글의 제목은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해 놓고서 "뜬금없이 바나바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고 의아해 여기실 수 있으리라.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앞서 아사셀에 관한 내용을 잠시 먼저 살펴보길 바란다.
| 야훼께서...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레위기의 말씀이다.
pixabay |
레위기 16장(개역개정)
6. 아론은...(중략)...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염소를
- "준비"(prepare)한다.
- "구별"(away from; 창12:1)하기 위하여 제비뽑기(cast lots)를 한다.
- 하나는 야훼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함께 있던 두 마리의 염소를 좌와 우로 나누어 세운 이후, 어떤 일을 행하는지 알아보자.
SightedMoon |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아사셀을 위하여 (본 그룹에서 따로 떼어내어) 구별된 염소를 (생명이 없는)광야로 보내야 한다. 이를 위해 대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하여 준비된) 염소의 머리에 안수기도를 한다.
www.monergism.com/day-atonement |
그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가 아사셀 염소에게 전가되니, 아사셀 염소는 죄인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되돌아 올 수 없는) 험한 지형의 땅에 이르러서, 그 염소를 광야로 쫓아버린다.
이 상황이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셨기를 바란다.
자! 이제 바나바와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사도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다.
allaboutturkey.com |
| 성령께서...
바나바(바르바나)와 사도 바울(샤울)을 안디옥(안티옼)의 성도들로부터 (좌우로 나누듯) 따로 떼어 세워라고 하셨다. 따로 떼어 세운 이후, 안수하라는 명령을 기도하는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알려주신다. 그들이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기도를 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보냄을 받았다.
이때 성령에 의하여 또는 성령에 이끌리어 실루기아(셀뤼키아)로 내려갔다. 그리고 셀뤼키아에서 키프로스(퀴프로스)로 갔다.
레위기 16장의 문맥과 사도행전 13장의 문맥은 동일한 구조인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같은 필자의 생각에 동의가 되신다면, 그 이후에는 '아사셀(을 위하여 준비된) 염소'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실 것이다.
아사셀의 염소는 비단 모세의 성막 안에서만, 혹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행해지는 (성문화 된) 의식이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삶 속에서 (모세에게 일러주신 율법의 의식들이) 치뤄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깨달음이 된다.
율법의 행위는 (성문화된 율법서에 기재된)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에만 이루어지는게 아니었다.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거룩한 의식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고로 우리는 정해진 장소나 정해진 시간에 율법의 의식들을 치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해 질 수 있게 되었다.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면, 그는 이미 율법의 의식들 곧 율법의 행위들을 철저하게 행하고 있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사람의 뜻대로, 사람의 해석대로 행하려 하지 말자. 그럴 경우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옷을 입은 자처럼 입고 다니기 버거운 일상을 살게 된다. 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이는, 성령의 뜻대로 행하며 성령의 해석에 따라 (믿음의 분량에 맞게 정해진) 그 수준을 행하니 어찌 가볍지 않을 손가.
삶이 어려워진다고 낙심하지 말자.
현상황에 어둠이 깃든다고 하소연하지 말자.
pixabay |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의지하라.
그의 말씀만이,
그의 계획만이
우리에게 기쁨이요 감사며 찬양일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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