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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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obert Lukeman on Unsplash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개역개정) 주님의 입장에서는 "하루가 천년처럼, 천년이 하루 처럼" 여겨진다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다. one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like one day. (2 Peter 3:8b.NASB) 이 부분에서 오늘은 액면 그대로의 느낌을 논하고자 한다. 과연 어떤 상황이 되어야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한 번에 하나의 측면만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두 측면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전지전능하심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입장에서, 그래야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참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하루가 천년처럼, 천년이 하루처럼 느껴지는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극도로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강제적으로 책상에 앉혔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2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도 말해 주었다. 이때 아이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에게 있어서 2시간은 2일간 책상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의 크기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단 2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계를 쳐다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야. 겨우 2분 지났어?" 반면 틈만 나면 책을 펼쳐들고 책상에 앉아 독서하기를 즐기는 아이를 상상해 보자. 그에게 책 한권을 주면서, 2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독서하라고 말했다. 아이는 흔쾌히 그 말에 순종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책의 내용에만 집중했다. 그랬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종처럼 섬겨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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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아들을 남겨 놓은 채로 그의 종(slave)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만 여행 중에 심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부자는 큰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잡에 남겨 놓은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종에게 남겼습니다. "내 아들에게는 내 재산중에서 하나만 유산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모든 나머지는 (종) 네게 물려준다." pixabay (below all) 이렇게 편지를 써 주고 난 후, 부자는 죽었습니다. 주인의 장례를 잘 치룬 종은 부자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한달음에 주인의 아들에게 달려와 자신의 주인이 죽기 전에 남긴 편지(유서)를 내밀고는 당당하게, '주인의 모든 재산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 당신에게 주었고, 그 외 나머지는 다 자기 것이라'고 선포하듯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전해받은 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 중에서 겨우 한 가지만을 남겨주신 아버지가 몹시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들고서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갔다. 아들은 랍비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랍비의 반응은 몹시도 달랐습니다. 심히 크게 감탄스러워 하였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주신 지혜를 가지신 분이요." "만일 당신 아버지가 이런 편지를 써주지 않았더라면, 종은 거짓말로 아버지가 재산을 다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할 것이요." "그런데 분명하게 이런 편지를 만들어 준 것은 특별한 지혜요." "우리 나라의 법을 잘 아는 분이요." " 종은 재산이요 ." " 종이 가진 재산은

수(numbers)와 숫자(word)의 차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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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와 숫자"라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다. 더 쉽게 영어로 표현해 보면 number(수)와 word(숫자)다. 표현을 바꾸었더니 무언가 차이가 보이는 것 같지 않나? Number & Word 우선 word(숫자)를 설명해 보자. 글을 쓰는 모든 것은 문자(word)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문장을 이룰 때 그 의미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많아질 수록 정확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이러한 문자는 단지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것으로 표현하는게 전부다. 그래서 표현되는 그 자체 외에는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다. 반면 number(수)는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연산(operation; +, =, ×, ÷)이 가능한 것으로서, 연산에 의해 그 의미는 변화무쌍하게 다양해진다. 점(dot) 하나가 있다. 하나의 점(dot)에 무수히 많은 점들(dots)을 더하는 연산을 가하면, 이들은 서로 합력하여 "선분"(직선)이라는 변화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곧 무차원의 공간이 변화되어 새로운 차원, 곧 1차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1차원의 선분이 또 (일정한 양 만큼)더하여지면, 평면으로 발전하면서 (가로와 세로가 같아지는) 특정한 순간에 2차원을 만들게 된다. 2차원 평면이 또 (일정한 양 만큼) 더하여지면, 입체로 발전하게 되는데 (가로, 세로의 길이와 높이가 같아지는) 특정한 순간에 3차원을 만들게 된다.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영적 변화를 일컫는다. ※ 칼 세이건의 "와 닿는 차원의 이야기"(4분여 분량)를 보시길 강권한다. 영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문자(word; 숫자)는 차원의 문을 열 수 없다. 하지만 수(number)는 연산이 가능하다 는 이유만으로 차원을 열 수 있다 . 곧 연산의 가능성은 차원을 여는

대표성(representative)에 대한 오해가 심각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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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단체)을 이루려 할 때, 구성원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찾는다. 우리는 그를 대표성이라 말하고, 그 대표성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될 수 있는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들이 있다. pixabay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대표성을 가진 이들에 대해 심각하리 만큼의 오해를 지니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대표성을 가진 자"를 마치 (신격화 한)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youtube 모든 행함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부분에서 국민 또는 시민의 뜻을 "먼저 헤아린" 후, 그 헤아린 정도에 따라 의견을 결정해야 하리라. 이는 각자의 다양한 의견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각자의 의지를 조금씩 반영함으로써 "하나의 통일(조화)된 의견"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행위로 도출해 나가는 것이 대표성을 가진 자의 책무(의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이나 시민의 의견을 묵살한 채, 그저 자신의 의견(이 국민의 의견이라는 생각에서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오해 중에서도 가장 큰 오해다. 대표성을 가진 자는 어찌보면 중매장이라 할 수 있다. 양가의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중재는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자신의 실질적인 이익과 손해가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인물을 세운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등은 국정을 논하여 운영하기 위해 세움받은 이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party)적을 유지하는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하기 보다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해야 함이 옳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쉽지는 않겠지만, 당파를 떠나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왔던 왕들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

공감을 얻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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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below all)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지 말자. 모든 사실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권한을 나에게만 귀속시키지 말자.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 권한을 나눠 가져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상대방에게서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참과 거짓을 혼자만 결정하지 않고, 그런 권한을 서로가 나누어 가질 때 우리는 이것을 "조화"라고 말하고, 이러한 관계를 균형이라 말한다. 이 세상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 앞에는 늘 "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서로 합력할 수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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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간단하다. 혼자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해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아는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기에 온전한 형태를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반.드.시 합력(work together)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서로 합력 할 때, pixabay (below all) 비로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선"을 이룰 수 있다. 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를 반대로 해석해 보면, 독불장군처럼 혼자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선을 이룰 수 없다." 는 것과 같다.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많이 속상하셨나요?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신 그 분을 원망하셨나요? 하지만 그분의 계획 은 여러분에게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 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는 자 되는 것을 너무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해되셨나요? 그럼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오히려 감사 하실 수 있게 되셨나요? 크고 작은 두 아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형제애'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되는 "참 선"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고 그 연약함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연합할 자)를 찾아 보는건 어떠시겠는지요? 그가 당신과 연합하여 온전한 선을 이룰 유일한 자 가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가. 가족에서는 부모에겐 자녀가, 자녀에겐 부모가 교회(공동체)에서는 목회자와 성도가 국가에서는 대통령과 국민 이 되지 않을까요? 서로를 미워하고, 자신

사랑은 "나눠주는 것"이라 찬양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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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갖는게 아니라, 오히려 "나눠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삶을 얼마나 살고 있을까? 스승은 수업시간을 학생과 나눠 갖는가? 목회자는 주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성도와 나눠서 생각하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까? 가정의 일에 대해 부모는 자녀와 의견을 나누고 옳고 그름을 정하는 기회까지도 나눌까? 우리는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여 결국에는 "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는 말씀을 현실에서 목격하지 못한다 . "나눠주는 것"부터 하자. 이것은 배려(care)다. 이것이 섬김(care)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love)이다. 많은 (사역같은) 것을 하려 하지 말자. 그저 내게 있는 소중한 것을 상대에게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리하면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내가 상대를 이해하게 되나니, 그 안에서 야훼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한 일이 행해지리라. 입술로만 "사랑은 나누는 것"이라 찬양하고, 그 찬양을 아이들에게 세뇌시키려 하지 말고, 어른부터 본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요 교육이 어디있겠는가?

이 세대가 인공지능(AI)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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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below all)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하나님의 뜻대로 택하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이름이 불린 자... 하나님이 뜻대로 지명하여 부르신 자... 이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한다. 단순히 믿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이들에게 고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고하는 메시지다. 그들의 삶 전반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합력(work together)한다 고 한다. 그렇게 합력하게 된 것이 선을 이룰 수 있다 고 말한다. 이것이 선을 이루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The way)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겠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합력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5 사람이 하나의 그룹을 구성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A, B, C, D, E라는 사람들이다. 그룹을 지정했고 그 그룹이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면 그룹의 "지향하는 뜻을 지켜 행하기"(샤마르; Shamar) 위해 각자의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이렇게 할당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면 그 그룹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상적인 그룹의 운영방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A라는 사람은 능력이 출중하여 그룹에서 할 모든 일들을 누구보다 더 잘한다. 그래서 A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듯 그룹의 모든 일을 혼자서 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당신들은 내가 벌여 놓은 일의 뒷처러만 하세요"라고 했다. 이런 그룹의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