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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알 수 없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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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알 수 없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desktopbackground.org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께서... ... "세상"을 "사랑"했다. 이 사실이 "먼저"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다.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데 내 삶은 왜 만족스럽지 못할까? 이 질문을 다른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는 왜 (지금의) 삶과 (지금의) 일터에 보내졌을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다고 믿는다. 요3:16절은 우리의 이러한 질문에 명백한 답변이 된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 일터를 사랑하시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 일터로 여러분이 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 필요했지 않겠는가? 고로 우리 믿는 이들은 각자 각자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곳을 향해 보냄받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인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보냄받은 자"인 것을 인지하고, 보냄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다. 고로 우리는 "메시아"(A messiah)다. 예슈아(The messiah)를 닮은 메시아(A messiiah)다. ※ 아들을 보고서 "너는 네 아버지를 꼭 닮았구나"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아들과 아버지가 "같다 또는 동일한 존재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아들을 봄으로써 그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뜻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a) 나를 본 자는 아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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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같이 읽고, 읽고자 노력한다. 그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개역개정) 의 말씀이 믿는 자들에게는 강한 도전을 주곤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를 우리 자신(의 삶)에게 적용함과 동시에 강한 의문점 혹은 궁금증이 나타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부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해 보자. 갓난 아이에게는 "뜨겁다"라는 말의 이해가 없다. 그래서 눈에 보기 좋은데로 그들은 손을 뻗어서 만지고자 한다. 이때 현명한 부모는 "아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뜨거움"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건 뜨거운 거야"라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각성)할 수 있게끔 한다. "뜨겁다"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이해, 각성)할 수 있는 아이는 (뜨거운 것을 겁 없이 만지려던) "삶의 방식"을 정확하게 바꾸게 된다.  마찬가지다. 갈2:20의 말씀을 삶 속에 정확하게 적용하고 싶다면, 그 말씀이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영향력을 받지 않기 위해 혹은 그 영향력을 받기 위해 삶의 어떤 부분을 돌이켜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자신의 모습 또는 그 믿음의 형태가 삶의 어느 부분에 작용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부분이 어떤 현

당신에게 세계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주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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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below all)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오늘 이 순간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재물이 당신의 것이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당신을 괴롭혔던 자를 붙잡아서  그간 쌓였던 분노를 풀 수 있겠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비난을 받았던 일들에 대해 보라는 듯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당신을 비난했던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가난하다고 무시했고, 가진 게 없다며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었던 마음을 달래면서 보라는 듯이 돈을 쓰고, 눈에 보이는 데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겠는지요? 우리는 기도합니다.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재물"을 달라고. 그것들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자가 되겠노라고.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막대한 힘과 지혜와 재물이 부어지면 우리는 그것들 역시 우리의 뜻대로 사용해 버리고 맙니다. 곧 야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힘과 지혜와 재물이 임해야 만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시나요? 그 믿음은 그릇된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 만이 이후에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 힘과 지혜와 재물이 주어집니다. 오늘의 시간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히 여기십시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성하십시오. 오늘 안에 뜻하신 바를 온유한 자의 모습으로 복종(obey)해 보십시오. 주께서 뜻하시는 바는 바로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를 들어 쓰십니다. 기도에 열심은 있으나,

열혈강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천국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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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강호"는 오래토록 국내외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오고있는 만화로서, 오늘 날까지도 연재가 계속되고 있는 국내 최고의 만화들 가운데 하나다. 열혈강호의 연재 역사. 1994년 만화잡지 영 챔프의 창간과 함께 해왔던 유일한 만화 연재작으로 2009년 영 챔프의 종이잡지 발행이 종료되고 2013년까지 사실상 영 챔프와 동고동락을 하였다.  현재는 코믹 챔프로 연재를 이동하여 계속해서 연재를 하고있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될 수 있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영감 (spiritual inspiration) 아울러 그 영감을 받는 자는 "빛 또는 어둠"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겠지만, 영감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빛과 어둠의 조화"에 의해서만 표현된다. 영감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영"(Spirit)이기 때문에. 그래서 작가가 영감을 "볼 수 없는 상태, 곧 영의 모습" 그대로 독자(reader)들에게 표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느 누구도 작가의 작품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반드시 "눈이 보이지 않는 실체를 눈에 보이는 실체로 바꿔"서 표현해야만 한다. 어떤 실체가 눈에 보이기 위해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음과 양의 조화"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질서요 균형(조화)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혈강호의 영적 출처를 따질 수 없을지라도, 독자를 향해 출간된 작품에서는 "음 또는 양에 속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은 열혈강호가 이야기하는 "각성"에 대한 영적 의미를 알아보기로 하자. 만화의 한 장면

지난 날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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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 오는 가운데 "후회"없이 지나올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온 이 또한 한 사람도 없다. squirmypopple.com 그래서 따지고 보면 모두가 상처를 껴안고 살고 있는 삶이 인생이고, 그 상처가 주는 고통의 굴레에 갇혀서 버겁게 살아가는게 우리네들의 인생이다. 하지만 상처가 주는 고통을 언제까지 겪어야 할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양심을 예로 들어보자. 주변 사람들 몰래 나쁜 죄를 저지른 그는 주변의 시선을 늘 예의주시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지 않음에도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마치 자신을 해하려는 이로 여기면서 산다. 그래서 그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만 가고 급기야 사람들이 없는 어둡고 칙칙한 곳을 찾아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에 들어가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그 눈은 어둡고 칙칙한 곳에 숨어있는 그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한다. 마음의 무게를 더 하여 커다란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자 그는 결단한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자신이 지난 날에 저질렀던 잘못을 세상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죄 값을 달게 받길 스스로 청한다. 그 결과 이전에는 두렵게만 느껴졌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제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에게 평강이 임하였다. 그의 몸은 (죄의 대가를 위해) 비록 감옥에 가야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는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올지라도 그는 요동치 않고 강한 자의 눈으로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같게 되었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자의 모습을 소설과 같은 예화로서 담아 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 죄를 범하

보이지 않는 길을 안내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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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나침반은 compass라고 표현한다. 콤파스는 한자어로 법을 뜻하는 "규"(規)로 나타내는데, 성경에 "규"가 등장한다. 그 순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5:2)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히1:8) 주님의 규는 공평하다. 이때 공평하다는 말은 다음의 구절과 연결되어 해석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b) 아하수에로 왕 앞에 무작위로 나아가는 것은 금기시 된 것으로써, 마땅히 죽어야 될 중한 죄다. 하지만 "규"를 내미는 자에게 만큼은 중한 죄가 사함을 받는다. 즉 어떤 이에게는 무례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기쁘게 여길 수 있다는 뜻으로써,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시는 주님의 규(sceptre)다. 그 규는 우리가 아는 콤파스 또는 나침반을 일컫는다. 나침반의 잘 아는 이야기를 해 보자.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우리는 지구의 북쪽과 남쪽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나침반을 이용함으로써. 그런데 나침반은 어떻게 지구의 남과 북을 가리킬 수 있는 걸까?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그 바늘은 "자석"(magnetic bar)으로 이루어져 있다. 곧 자석은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정확하게 남과 북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남과 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pixabay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일까? 모두에게 동일한 길일까? 나에게 곧을 길이 제시된다고 해 보자. 그럼 다른 옆 사람에게도 동일한 곧은 길이 제시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모

역동성을 표현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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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디자인 또는 어떤 보여주기 위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주 거론되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모습" 또는 "역동성"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역동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살아 있는 느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림으로 그 차이를 느껴보자. Population Reference Bureau 다음의 그림을 보자. 두 그림은 "동일한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숫자"로, 다른 하나는 "그래프"로 나타내었다. 이때 나라 간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더 잘 표현되었을까? 숫자가 줄 수 있는 "차이"에 대한 느낌보다, 그래프가 줄 수 있는 "차이"의 느낌은 더 강렬하다. 그래서 문장보다는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숫자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보다는 살아 있는 실체를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강렬하게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성경책의 글씨만을 그저 읽는 독서의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보다, 설교자의 설교를 청취하는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보다, 타인의 간증을 통해 간접적으로 예슈아의 살아계심을 느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직접 예슈아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직접적인 체험(간증)있는 삶을 살아갈 때, 이보다 더 강렬한 영적 감동은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youtube 요한복음 4장(흠정역) 6. 이제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그런즉 예수님께서 여행에 지치셨으므로 우물에 그대로 걸터앉으시니라. 때는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 길으러 오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내게 달라, 하시니 우물가에서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슈아의 모습이 기록된 성경 말씀이다. 예

내가 아는 것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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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자는 배운 자를 대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래서 배운 자 또한 자신도 모르게 시종일관 "가르치는 입장"으로 배우지 못한 자를 대한다. 부하 직원이 직장 상사를 대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래서 직장 상사 또한 자신도 모르게 시종일관 "가르치는 입장"으로 부하 직원을 대한다. 가르치는 이의 말을 듣다 보면 느끼는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이야기 한다. 자신의 아는 바가 세상의 전부일까? (물론 그렇지 않는다고들 이야기 한다. 하지만 대화 중에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지식이 세상의 전부라면, 그 세상은 얼마나 커야 할까? 필자 본인만의 견해이지만 함께 나누길 원한다. 사람이 서서 돌아 다녀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의 두 발이 딛고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리에 앉아야 할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가 앉기에 충분한 방석 만큼의 크기"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야 할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 시신을 담을 관 만큼의 크기"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크기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 크기의 최고 정점은 "관의 크기"일 뿐, 그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 이후에 시신이 썩어서 흙이 될 즈음이면, 그때는 관 조차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없어질 테닌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자신감있게 거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겨선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생각 위에 올려 놓기 위한 "분쟁과 다툼"은 사라지고, 서로간에 진정한 토론과 회의가 진행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