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7의 게시물 표시

김종철감독의 네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 루터의 두 얼굴 (상영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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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감독의 네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 루터의 두 얼굴   이용시간 정보 ▶2017년 12월 14일(목) : 오전 11시 / 오후 4시 / 저녁 7시 30분 (총 3회) ▶2017년 12월 15일(금) : 오전 11시 / 오후 4시 / 저녁 7시 30분 (총 3회) ▶2017년 12월 16일(토) : 오전 11시 / 오후 4시 / 저녁 7시 30분 (총 3회) 알립니다. ▶예매티켓 현장구매는 공연 1시간 전부터 가능합니다 ▶현장판매는 15,000원 입니다 ▶공연 관람 당일 취소, 환불, 변경이 불가합니다 ▶교회 건물 내에 주차시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티켓을 배송 받으신 경우 받으신 티켓을 지참해 주셔야지 입장 가능합니다 ▶티켓 현장 수령은 따로 티켓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현장에 오셔서 성함을 말씀해주시고 티켓을 수령해주세요 ▶음료 및 음식물 섭취가 불가합니다. 20명 이상 단체관람 문의 031-926-2722로 전화주세요 기획사정보 주최: 브래드 필름 주관: 브래드 TV 문의: 031-926-272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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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나쁜 의도를 위해 사용하는 자가 있다. IZQuotes 이 말을 바꾸면 아무리 악한 것을 만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선한 의도를 위해 사용하는 자가 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인지 장담할 순 없다.

농부가 배움을 얻는 시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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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늘 부족하다. 한 번은 풍년을 이루었다지만, 그 다음 해엔 여지없이 흉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는 (사람의 노력을 무시할 순 없겠으나) 하늘의 도움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천직(天職)이다. 자녀를 키우는 것 또한 우리는 농사로 비유하여 말하곤 한다. 그렇기에 자녀를 양육하는 것에 있어서도 "장담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손을 놓고 마냥 방관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 자녀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평범한 표현이 있다. 저 부모는 (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그래서 흔히들 넌 네 부모에게서 무엇을 배웠길래 그처럼 행동하는 것냐? 라고 말한다. 결국 자녀의 됨됨이는 부모의 자녀 교육 또는 부모의 자식농사에 대한 평가를 시사한다. 이는 "부모가 가르쳐 준데로 자녀는 행동한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는 자녀에게 있어서 평생의 "교육자" 또는 "선생"인 셈이다. 이런 사실을 회피하고 싶겠지만, 피할 수 없는 관계다. 히브리어는 이러한 사실을 부모의 마음인 Leb(לב)로 표현한다.  히브리 성경인 Torah는 첫번째 단어 " בראשית "(창1:1, 태초에)의 첫 알파벳 " ב "(beit)와 마지막 단어 " ישראל "(신34:12, 이스라엘)의 마지막 알파벳 " ל "(lamed) 에 의해 둘러 싸여 있는 형상으로서, 이것을 문자화 한 상형문자다. 마치 부드럽고 영양 많은 호두가 단단한 호두껍질에 둘러 싸여 있는 것처럼. 그래서 Torah는, 만나(manna)는, 아버지의 마음(Leb)은 호두껍질에 해당하고, 생명되신 빵(lechem; 레헴)은,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교훈과 가르침은 호두에 해당한다. 참고) 왜 “야훼 하나님은 자신을 전쟁에 능하신 주”

Fitness 트레이너가 들려주는 "예슈아의 가벼운 멍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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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tness 개념은 일명 몸짱 또는 초콜릿 복근 이라는 말이 성행하면서 현시대에 급부상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다. 필자도 "중증근무력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던 근력을 되찾기 위해 헬스장을 찾은지 벌써 1년이 넘어간다. 헬스장은 동네 어귀에 하나 쯤 있을 법한 삶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헬스장에서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비밀 하나를 알아보길 원한다. 평소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왜소한 외모에 자신감을 불어 넣고자 힘겹게 (친구의 권유를 받아) 헬스장을 찾게 되었다. 헬스장에서 그의 시선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역기였다. 그의 발걸음은 서서히 그 역기 앞으로 다가가게 되었고, 그는 조심스레 10kg에 달하는 역기를 들어 보았다. "허걱!" 10kg이 별거 아닌 줄로만 알았던 그는 자신에게 몹시 버거운 무게라는 사실에 새삼 놀랬다. 그 순간 그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찾아 왔다. "나는 이곳에서의 트레이닝(훈련)을 견뎌내지 못할거야" 두려움은 마음을 점점 더 나약하게 만들었다. 나약함이 더해져만 갈 수록 그의 마음 속에 찾아든 두려움은 더욱 두터워져만 갔다. 그런데 반대편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듯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눈길은 머뭇거림도 없이 헬스장 신참에게로 다가오더니 다정한 미소로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역기로 부터 느낄 수 있었던 두려움은 낯선 장소에서 대화 상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더욱 증폭되어 가고 있었는데, 자신을 향한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자 그의 마음은 조금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역기가 제겐 너무 무겁네요." "저에겐 헬스가 맞지 않나 봅니다." "아~ 그러셨군요." "제가 말을

천국에서 받는 상급. 풍성히 받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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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문제에 나름 관심이 많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아래의 영상을 통해,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베네수엘라의 교훈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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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석유가 돈인 줄로만 알았다. 석유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는 줄 알았다. VICE News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알았다. 우리는 금과 은을 소유하면 사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믿는다. 이 사실은 참일까? Euronews 베네수엘라의 교훈은 말한다. 그들의 석유가 그랬던 것처럼 금과 은은 우리의 보험이 될 수 없음을. ☞ 베네수엘라의 어제가 한국의 오늘이 되지 않기를 오직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니, 이는 주 예슈아를 믿는 것 뿐이다. 삶을 담대히 바라봄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담대한 사고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될 때,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그는 그 세상을 굴복시키고 정복함으로써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 땅을 정복하라 .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 하시니라. (창1:28. 흠정역)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와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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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을 주도하는 사수가 있는가 하면 사수를 보조하여 돕는 자로 발탁된 조수가 있다. 사수와 조수의 관계는 어느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조수는 항상 사수의 뒤를 따라야 한다. pixabay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7b~8) 성경 속 내용은 사수와 조수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물건 그 자체에 욕심을 낸 자는 절도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 반면 물건에는 욕심이 없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람(A씨)을 미워한다. 그런데  A씨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A씨가 (물건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몹시도 슬퍼하고 낙심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도록 그는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소유했을 즈음이면, 그 물건이 망가지든 없어지든 상관하지 않은 채로 가치없이 여겨버린다. 어찌보면 동일한 절도행각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사실은 다르다.  전자(the former)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the latter)는 어떤 사람을 미워하였기에 죄를 범했다. 그의 죄는 욕심에 근원이 두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  "도둑"이라는 죄명이 "살인자"라는 죄명과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 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 로 죽었고(민27:3a) 슬로브핫 딸들의 고백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야훼 하나님을 대적(betray)한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배신"(betray)이라는 테마는 &q

[수학으로 보는 성경] 수열의 극한으로 미리 계산해 본 천국에서의 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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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회) 공동체 안의 우리는 "야훼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역"을 위해 삶의 어떤 무엇보다 우선시 해야 할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강요 아닌 강요를 받곤 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간다. 어찌보면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즉 돌봐야 할 가족있고, 마땅히 생계를 위해 해야 할 업무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휴식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 있고, 그 외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알차게 봉사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는다. 우리들의 모든 삶은 이렇듯 "조화"(harmony; balance)를 이루어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한 편이다. 앞서 제시했던 삶의 모습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봉사에 우선순위를 두게끔 유도받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정사에 소홀 아닌 등한시 되며, 자신의 업무에 집중함으로써 더 개선된 성과 또는 소속된 기관에 더 나은 영향력을 끼치기 보다는 늘 시간에 쫓기듯 업무를 마무리 하게 된다. 그 결과 업무의 질적인 측면은 고사하고 양적인 측면까지 기대에 못미치는 일이 있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듯 바라보아야 할까? 신앙 공동체에서 보다 많은 봉사와 헌신을 행해야만 천국에서의 상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런 그런 달콤한 말"에 우리는 오늘도 이리저리 이끌다녀야만 하는 것일까? 수학은 세상의 모든 이들도 인정하는 "자명한 모습(값)"을 보여준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서도 인정받는 "자명한 증거"가 있으니, 오늘은 그 증거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일정한 규칙 등으로 인하여 무한히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수치들이 있는데, 이것을 "수열"(sequence)이라 한다. 수열은 쉬지 않고 무한히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가운데 "특정한 값(수준)"에 도달

[수학으로 보는 성경] 제논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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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수의 열을 수열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숫자들의 단순한 배열 또는 무한히 이어지는 배열"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란 점이다. 수열의 예를 들어보면 "1, 3, 5, 7, 9 ..."등은 무한히 배열되는 수열의 한 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배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한정 나열해야 하는 것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겠다 싶은 부분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수열의 극한"이라는 수학적 문제에 있어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먼저 제논의 역설로 유명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를 이야기해 보자. youtube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애시당초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게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준비된 트랙" 위에서 경주를 하기로 약속한다. 단, 이 경주에는 특별한 제한 조건이 선행된다.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일정 거리"(약 10m) 이상을 앞서서 출발한다. 그렇게 아킬레스의 앞에서는 거북이가 이미 앞서서 달려가고 아킬레스는 거북이의 뒤를 쫓을 뿐이다. 거북이는 걸음이 느리다. 하지만 아킬레스가 10m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서 거북이의 위치에 도달할지라도, (비록 느리게 걸었지만) 거북이는 여전히 아킬레스보다 앞에서 달리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도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이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스는 당연히 거북이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영역"에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함께 두었더니,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는 너무나도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추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논리 가운데에서 어디가 잘못된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길 선택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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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이하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종(slave)이 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이러한 관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 예슈아 하마쉬아흐(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신랑(예슈아)과 신부 사이의 관계입니다. 즉 온전한 부부요 둘이 온전한 하나(א)를 이루는 그런 관계 에서만 허용되는 사실이 다름아닌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 되는 것"이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육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들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탐욕과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우리들을 자신의 종(slave)으로 삼으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바보 상자(TV; 영상 매체)를 즐겨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자신들 마음대로 다스리고자 "편리를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 저주란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저주스러운 삶.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 당나귀가 된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잊지 않으셨죠? 누군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탐욕과 즐거움을 마땅히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제안하죠.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부부 사이"는 아름답습니다. 이면에 탐욕과 사리사욕을 숨기고 있는 자와 맺는 계약 관계에서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필요를 채움받지만, 이후에는 우리들이 그들의 필요만을 채워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