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거듭남일까? 생활 속에서 느끼는 그것이다.

faith and sight

젊은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늦은 밤 중에 예슈아를 찾아와서 묻는 대화 가운데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거듭남(re-born)이다. 거듭남이라는 단어는 당시 신학적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단어였다. 

니고데모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종교적인 명망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지도하는 그런 위치에 있던 자였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요3:1)

신학적으로 전혀 부족할 것이 없겠다라고 여길 만한 신분적 위치에 있던 그가 돌연 예슈아를 찾아와서 뜬금없는 말을 한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3:2)

이 말인 즉슨 무엇을 의도하고 하는 말일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당신은 분명히 야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자신은 그와 같은 면모를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음을 넌즈시 알리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그 대목만큼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표적들'만을 예시로 제시한다. 이미 눈에 보이는 증거들만을 제시함으로써 '야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내용을 사실로서 인정하려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이 진정으로 옳다고 여길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기사와 표적만으로 '야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마24:24)

야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 여부를 분별하는 것은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를 삼으면 안 된다고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그 대목을 잊어선 안 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 조차도 그런 기사와 표적을 보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이미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미혹하려 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신학을 연구 하시는 분이나 공부 하셨던 분들, 그리고 나름 성경을 잘 안다는 성도들 조차도 '선택받은 자들에겐 야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니 '기도와 말씀묵상에만 집중하라'는 권면을 너무도 쉽게 하곤 한다. 기도와 말씀 묵상만 하면 그의 삶은 저절로 이루어질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러한 권면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우매한 삶으로 내몰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농부가 수확되는 곡식을 먼저 얻는 것이 당연합니다.
디모데후서 2:5~6. 쉬운성경


경기 규칙에 대해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하면 규칙을 피하여 더 적극적으로 플레이를 이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게 될 때까지 이 모든 것을 단순하게 여기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날씨와 기온의 변화를 분별하여 언제 파종하고 언제 물을 줘야하는 지 그리고 언제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지 등의 갖은 분별과정을 이룰 때 탐스러운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그런 수고를 기꺼이 행하는 운동 선수가 우승을 거머쥘 수 있고, 그런 농부가 첫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니고데모가 '기사와 표적'만으로 예슈아의 영적 상태를 짐작했다고 하는 부분은 그리 대단한 대목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슈아는 니고데모에게 '어떤 뜬금없는 설명'을 하신다. 불필요한 내용을 설명하시는 분도 아니며, 또한 그런 내용들은 성경책에 기록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니고데모에게 꼭 필요한 영적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시는 말씀이다. 아울러 '기사와 표적'만으로 자칫 야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릴 수 있는 우리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하기 위해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 거듭난 자는 볼 수 있다 Vs. 거듭나지 못한 자는 볼 수 없다.


우리는 거듭난다는 단어를 생활 속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목회자 분이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을 가는 일이 많다 할지라도 '거듭나야 한다'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는 전무하다. 혹 전도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내용 중에 겉들여 질 수는 있겠지만, 일상의 삶을 이야기 하는 중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니고데모가 예슈아를 찾아갔던 그 당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성경을 열심히 읽는 우리 이방인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 그 자체다. 고로 신앙 가운데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당연히 사용되어야 하는 단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그 단어의 현상은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거듭난다는 단어를 설명할 수 있었던 니고데모의 지적 추론 능력 역시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이해의 한계는 추론까지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3:4)

거듭난다는 말에 대해 니고데모의 설명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학자들의 생각은 각종 이론으로 요약/설명되고, 그 이론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을 통해 '눈에 보이는 증거'로 구현된다. 눈에 보이는 증거 몇 개를 제시함으로써 (볼 수 없던) 범죄 현장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법정에서 가장 유효하다는 사실과도 같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설명'(이론)은 눈에 보이는 '증거'(실험)와 반드시 연관성이 지어져야만 한다는 게 만물의 이치인 셈이다. 이를 벗어난 이론과 실험은 인정받지 못한다.

니고데모는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간다'는 추론까지는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의 추론은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는 반문을 통해 스스로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결론지었다. 당대 나름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신학자의 반열에 있는 그 조차도 '추론 정도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된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최소한 3천년 이상의 신앙이 깃들어 있는 유대민족이다. 그런 민족의 신앙적 지도자가 알고 있을 법한 성경적 사실은 이방인인 우리들과 견줄 수 있을까? 바리새인 즈음 되면 모세오경 전체를 외울 수 있는 이들이며 일반 백성들의 최소 수준이라 함은 모세오경 중 하나의 책 정도는 외울 줄 아는 민족이다. 신앙의 깊이 내지는 신앙의 지식 수준에서 그 깊이가 믿는 이방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받아 들일 수 있는 '거듭남'에 관한 이해의 폭은 '상상 속의 일'이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곁들여 져야만 설명 가능한 단어라고 이해했다.

"거듭남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들의 입술은 부르르 떨지 않을까 싶다. 말을 해야겠는데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들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슈아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서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예요"
라고 단호하게 답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추상적인 설명으로는 니고데모도 가능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럼 우리들의 설명은 어때야 할까? 우리들의 설명 역시 추상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 상황에 맞도록 구체화시켜 설명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설교를 비롯하여 신앙을 갖고 있다는 우리들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어린 아이가 했다고 하자. 이때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말이 될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라고 말하면, 어린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믿음은 무엇이예요?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라고 되묻는 게 정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답변'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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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물음에 단순하게 "열심히 해야 지"라고 답하는 어리석은 부모가 없듯이, 우리들의 답변 역시 어린 아이가 능히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의 일로서, 현실 가능한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

"책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두 번 내지 세 번을 읽어보라"
"그렇게 읽은 책을 머리 속에서 기억하면서 내용을 정리해 보라"
"책 속에 말하고 하는 의미가 나의 정리된 내용 속에 잘 담겨져 있는 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검증을 받아보라"
"책에서 의미하지 않는 또다른 의미를 내가 정리한 것은 아닌가 역시 선생님과 부모님께 검증을 받아보라"
는 등의 상세한 삶의 내용이 어린 아이가 가능한 수준 내에서 제시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아이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의미의 깊이를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진솔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추상적이다'는 말의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이론과 실험의 두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고 실험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주로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반면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면서 실험을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과학적이라 말하며 합리적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우리는 진리로 나아가는 증거라고 인정한다.

| 성경 역시 마찬가지다.

성경 속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많은 수의 추상적인 단어들이 즐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많은 단어들이 현실적으로 성취되지 않고 예언된 그 상태로만 존재하게 될 경우, 성경 속 단어들은 '추상적인 것들'로 치부되고 만다.

...(중략)...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주기도문은 성경 속 단어들이 추상적인 것으로 치부된다면 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을 매일같이 힘써 증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통해 증거하는 자, 곧 제자의 삶을 살아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만한 짐을 지고 있으니, 그 짐이 바로 자기 십자가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7)

우리는 세상에 속한 그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특별한 권세를 부여받았다.
그 권세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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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권세를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각자의 마음에 던져보길 바란다. 그 권세는 어디에 써 먹는 권세일까?

그 권세는 '하늘의 것을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는 자'에게 부여된 자격이요 권세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제시된 그 예언의 말씀들이 실제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끔 몸소 살아내는 '그 자격'(authority)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어느 누가 하늘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성경 속 말씀대로 삶을 살아낼 수 있겠는가? 오직 그 권한을 부여 받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는 것처럼,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택된 자에게만 허락된 특권
이다. 이렇듯 우리들의 특권은 추상적 또는 관념에만 머무를 수 있는 만물의 이치를 실제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모세는 하늘의 성전을 보았고, 그 성전을 이 땅에 모형으로 그려 놓았다. 그 모형은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비유'가 된다. 모세는 어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 Follow the role; 역할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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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따라 지으라'는 그 명령대로 온전히 행한 자. 그는 모세다. 그것처럼 행하신 이 또한 예슈아다. 예슈아는 아버지를 보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행하신 그 행함 그대로를 이 땅에 본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
(요5:19)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것을...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모세는 하늘의 성소를 이 땅에 모형으로 구현했다.
그리고 예슈아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 심령에 성령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중략)...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1~12)

부활하신 이가 아직 부활을 맞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 행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후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을 (땅에 있으나) 사람이 창조하지 않는 성전에 들어가게 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예슈아를 비롯한 성경 속 모든 이들은 '단 한 가지의 일'만큼은 분명하게 하였다. 예언이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구현되게끔 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그럴만한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중략)...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re-born)이니라
(요1:12~13)


| 이제 '거듭남'에 대해 다시금 스스로 질문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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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거듭난 자는 예슈아를 믿는 자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은 그저 추상적일 뿐이다. 거듭난 자의 진정한 의미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듭난 자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자다.

무엇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다. 

자신의 일상 생활을 통해 성경 속의 말씀대로 살아내는 그런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자다. 그렇기에 성령의 허락을 받지 못한 자는 살아낼 수 없는 그런 류의 삶을 그는 거뜬히 살아내게 된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거듭남이라는 말을 바꿀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해를 토대로 '거듭나다'(re-born)라는 말을 좀더 쉬운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깨달음(understanding)

제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수학 문제를 깨닫지 못하면, 합당한 답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문제를 깨닫는 자는 비록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합당한 답을 이끌어 낼 수 있음과 같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4:10~11)
  • 비유는 '자물쇠로 잠그다'(lock)란 뜻과 같다. 열쇠를 가진 이에게만 허락하고, 열쇠를 소유하지 못한 자에겐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비유의 반댓말은 계시(reveal)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외인에게 주는 것이 금지(막4:12)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한다. 보아도 무슨 뜻인지 역시 이해를 못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 어떻게?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막4:13)

성경에 기록된 '알다'라는 의미는 바로 이해(깨달음; understanding)을 허락받은 자를 가리킨다. 앎을 허락받은 자는 그렇기에 허락받지 못한 자와 다르다. 자신의 삶에서 성경의 예언을 살아내는 그런 모습에서 부정할 수 없는 구별됨을 보여준다. 이런 삶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자는 '거듭난 자'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추상적으로.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해 성경의 말씀을 실현한다'는 이해까지는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거듭남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그쳤다. 하지만 예슈아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3:10)


| '백문이 불여일견'이 최고인 이유

  경험하지 않은 것은 전할 수 없다. 경험한 자에게만 삶으로 온전히 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예슈아는 지적하신다. 명확하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하고
본 것증언하노라
...(중략)...

(요3:11)

smartomaizu.com


여러분.
설교를 통해 무언가를 보았나요?
그렇다면 그 본 것 그대로를 오늘부터 삶에서 살아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자로서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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