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는 왜 예화를 통해 말해야 하는 것일까? 히브리어의 비밀을 찾기
탈무드는 왜 예화를 통해 말해야 하는 것일까?
히브리어의 비밀을 찾기
탈무드의 한 내용을 소개해 보자.
수다쟁이면서 허풍이 심한 여인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수다와 허풍에 시달리다 못한 마을 주민들이 급기야 랍비를 찾아갔다.
랍비를 찾은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겪었던 피해들을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의 피해를 다 들은 랍비는 조수를 불러 수다쟁이 여인을 데려오게 했다.
랍비 "당신은 어째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만들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까?"
여인 "실제보다 약간 과장된 것은 있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했을 뿐이예요. 어떤 것들은 사실도 많아요."
랍비는 그 여인에게 깃털이 든 가방을 주고서 광장으로 가라고 했다.
랍비 "깃털을 길바닥에 하나씩 내려 놓고서 집으로 가세요. 도착하면 다시 내려 놓은 깃털을 하나씩 주워모으면서 광장으로 가세요."
랍비가 시킨대로 여인은 깃털을 하나씩 내려 놓으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무척 쉬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깃털을 다시 주워 모으면서 광장으로 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려웠다. 심지어 불가능했다.
이 모든 사실을 여인은 랍비에게 털어 놓았다.
랍비 "험담이라는 것은 그 자루 속에 든 새털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입에서 나오면 다시 주워 담기란 어렵답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습에 뉘우치고서 다시는 수다와 허풍을 떨지 않았다.
탈무드는 수 많은 랍비들이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진 교훈과 훈계를 담고 있는 이야기다.
따라서 수 많은 랍비들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져서 오로지 순수한 결정체만 남은 것이 바로 '교훈과 훈계'를 담은 창조의 이치(principle)라 할 수 있겠다. 삶의 모든 사실들 가운데 (군더더기는 제거하고) 꼭 필요한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처럼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이치는 삶의 전반을 녹였을 때, 녹지 않고 남은 뼈대라 할 수 있다. 생선을 먹고 나면 남는 그 뼈대처럼.
이 이치(principle)는 하나의 문장 안에 모두 담겼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이치를 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전달이 쉽다는 것과는 반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 발생했다.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는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이치들이 개입하는 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을 거쳐 문장 하나 하나를 고르고 골랐으며 그 안에선 단어 역시 고르고 고르는 수고를 통해 이치를 담기에 충분한 단어라 판단된 것들만을 하나의 문장에 담았던 그 과정을 이제는 역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즉 하나의 문장을 의미가 왜곡되지 않는 수준으로 풀어 헤쳐고 쪼갠다. 하나의 문장을 하나의 문단으로부풀리고, 하나의 문단은 여러 문단으로 다시 재구성 되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우리는 예화라고 부른다. 예화는 그런 이유 때문에 늘 '교훈과 훈계'를 담고 있는 책이며, 그 안에선 창조주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이것이 탈무드다.
그러면서 탈무드는 그렇게 유대인들 사회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방인인 우리들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탈무드는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겠다.
살면서 한 번 쯤은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물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럴 때 분명히 삶의 전반이 시간을 따라 진행되었지만 그 순간을 지나온 자신에게 만큼은 (모든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몇 가지의 사건들에만 의미를 둔다. 그리고 그 사건들만을 연결지어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내면서 '성경 속의 그 말씀이 정말 참이었어. 야훼 하나님은 살아계셔'라고 말하며 야훼 하나님의 마음(principle)을 실제로 만났다는 그런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백은 간증(Testimony)이라 불린다.
간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눈 앞의 실제 상황 속에서 특이한 사건 몇 가지만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서 이내 하나의 문자로 만들어 그것을 언어의 기본으로 삼는 상형문자와도 유사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처럼 새들, 나무가지, 기타 등등의 의미있는 몇 가지를 그려 놓고서 그것을 가리켜 'Pharaoh Nebty'의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 것 또한 상형문자의 특징이다. 간증은 이와 너무나 유사하다.
| 히브리어는 상형문자다.
다시 말해서 생활 속에서 현재 진행중인 어떤 상황이 간단한 모형으로 축약되었고, 그렇게 축약된 모형들이 다시 하나의 모형으로 간소화되어 문자화 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는 문자이지만, 사실은 문자가 아닌 생활 속 이야기인 셈이다.
마치 탈무드에 소개된 예화와 그 예화가 갖는 교훈이치의 관계처럼, 예화는 문자화 되기 직전의 실제 상황이고 의미는 문자화 된 히브리어다.
탈무드가 제작된 목적은
이치만으로는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이해를 돕고자 예화로 재구성하였다.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도 그렇다. 문자 자체적인 해독만으로는 이해를 얻기가 어렵다. 그래서 문자가 재구성된 예화 내지는 삶의 실제 상황이 연출될 때 비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간증있는 삶의 특징은 성경 말씀을 애써서 암송하려 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마치 내 몸의 세포처럼 내 몸에 새겨 넣을 수 있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왜? 깨달음을 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이 나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나의 기억이 내 안에 있는 한, 그 삶이 간추려진 히브리 문자(들)은 더이상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거하게 된다.
실제 상황이 문자화 된 것을 상형문자라고 말했고 그 상형문자 중의 하나가 히브리 문자인 이치처럼, 예슈아도 마찬가지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그렇다.
말씀은 현재 시점에서 창세 전부터 오늘 날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신다.
그 말씀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을 담아내는 것으로 문자화되셨으니, 그 과정을 '육신이 되셨다'라고 말한다고 할 것이다. 즉 그분의 크기를 어느 누가 볼 수 있겠는가? 광대하신 크기를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끔 그분의 크기는 최소화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슈아시다.
육신을 입으신 예슈아와 본래 말씀이셨던 당시의 예슈아는 그런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그 결과 육신이 되신 예슈아를 볼 수 있는 이들은 많아졌다. 그러나 그분의 육체를 보는 것만으로 그가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이라고 깨달은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그 육체가 삶을 살아냈고, 그 삶을 옆에서 목격한 이들에게서만 그 깨달음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 결과
'동행하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 신앙 속에서는
결단코
예슈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허다한 목회자 분들이 매 설교시간 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그 부분을 우리는 이렇게 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슈아께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 '이치가 담긴 하나의 문장'으로 (또는 비유 외에는) 설명하지 않으신 이유도 그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천국은 문장(sentence)이 아니다. 모든 결과와 현상이 이미 결정된 과거의 시공간이 아니다는 뜻이다. 천국은 현재 진행형으로서 삶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천국을 볼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 있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천국을 보았거나 볼 수 있는 자 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깨달음은 실제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체득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얻고 싶어도 혹은 준다 할지라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 문장은 기록됨과 동시에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린다.
가령 '한 번 입에서 나오면 다시 주워 담기란 어렵다.'는 것처럼.
그러나 예화는 다르다. 예화란 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들려지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예화가 들려지는 그 순간 만큼은 듣는 모든 이들과 동일한 시간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예화 속에 깃들어 있던 감동과 흥미진진함 등이 듣는 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마치 예화 속 주인공이 나의 옷깃을 만지작 거리는 것처럼 그 생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적이 된다.
여러분.
대개 우리는 현장감과 그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면서 성경을 읽곤 하지요.
하지만 성경은 히브리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긴박한 현장감과 생생한 감동이 있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과 성경의 말씀이 매칭되는 그 순간이 되면.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헛되게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랍니다.
하루에 허락된 삶 속에서 어떤 삶의 요소를 통해 성경말씀들이 매칭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의미는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그렇게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되며,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부인하지 못하는 산 증인이 됩니다.
그런 멋진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생한 감동이 깃들어 있는 실제 상황이 함축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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