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또는 평신도라 부르면 안 되는 성경적 이유.
창세 당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그 근본으로서 우리에게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교회(공동체) 안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다.
평신도는 목회자(와 관련 사역자들)를 제외한 믿는 자들을 이르는 통칭으로 사용된다.
성경 안에는 백성 내지는 (천국)시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평신도와 백성, 성도, 그리고 시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국가를 이루는 이는 국민이다.
그래서 국가를 이루는 국민을 가리켜 '백성, 시민, 평민, 인민'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부르곤 한다. 이 단어들의 차이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앞서 의문을 품었던 사실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한다.
| 평민
평민(平民)이라는 말은 귀족과 달리 피지배계급을 일컫는 말로써 영어로는 commons라고 한다. 이는 계급을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서, 해당 계급에 속하는 무리들은 모두가 동일한 존재로만 인식된다. 그래서 귀족 계급이 아닌 피지배계급에 속한 이들 평민을 사회주의에서는 '인민'이라는 단어로 부른다. '인민'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또 다른 단어는 uniform이다.
인민은 인민이라는 정체성 외에는 모두가 평등하다. 차등이 없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평등(균등)한 분배'만이 원칙이다. 이 원칙에 따라 '인민복'(uniform)을 입어야 하고, 배급(uniformal distribution)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계급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서 그저 명령에 대한 복종(obedience)만을 강요받는다. 이처럼 공통분모처럼 따라다니는 단어는 Unit(개체)다.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개체로서 목적이 사라지면 그 개체의 존재여부도 불분명해진다. 목적에 의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뿐, 존재의 가치가 인정받기 때문에 그에게 임무가 부여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평민이라는 단어는 Lego의 블럭 조각 하나가 갖는 존재의 의미와도 유사한 존재성을 갖는다.
| 백성
백성은 한자로 百性이라 표기하는데, 이는 '백가지의 성품' 또는 '매우 다양한 성품을 지닌 존재'라는 뜻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People이라는 복수형으로 표기되는데, 단수형은 person이다. person은 인격체로서 갖추어야 할 '격(格)을 가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양한 성품이란 무엇으로 그 다양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부를 때, 성품이 좋은 자와 나쁜 자가 있어서 '상대를 존중하듯 부르는 자와 상대를 무시하듯 부르는 자'가 있다고들 한다. 이렇듯 성품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등을 통해 주로 평가된다. 물론 가식적인 자의 행동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경우는 논외로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품이란 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내면이 안정된 자는 좋은 행동을 하고, 내면이 불한정한 자는 그릇된 행동을 한다. 결국 성품이란 내면의 상태와 연관성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성품을 격(格; person)으로 말할 수 있으리라 본다.
따라서 백성이란 '매우 다양한 인격체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 인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이 바로 그 인격이라 할 것이다. '형상을 따라 짓다'는 말은 '복사하다'(copy)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삶 속에서 copy라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단지 '부모를 닮는다'(유사성; similarity)를 의미한다.
아버지와 그 아들은 닮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역시 아들 또한 아버지가 아니다. 얼굴이나 외모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는다. 평소 행동 역시 다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고 무의식 중에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너는 네 아버지와 똑 같구나'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copy가 아니다.
copy는 본체의 모든 것을 100% 그대로 옮겨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 similarity(유사성, 닮음)는 본체가 가진 100% 중에서 일부분 만 옮겨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체의 형상을 닮은 이들은 모두가 '부분적인 존재'이며, 본체가 완전한 존재라면 그의 형상을 닮은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에게 모든 지혜가 속해 있음 같이, 그분은 지혜로운 판단 또는 생각을 할 줄 아시는 분이신 것이다. 고로 그분의 형상 중의 하나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짐승들의 경우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지 않으셨고, 인간만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 과연 짐승과 인간 사이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이성적 판단의 유무다. 그래서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한 이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성이라는 그 단어 속에는 '다양한 성품, 곧 인격체로서 다양한 사고를 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 시민
시민이란 일정한 영역 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구별됨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이 선택 또는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을 지언정, 시민에게는 전체가 아닌 부분적인 영역에 속해있다는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소속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영역 밖과 영역 안이라는 사실은 시민이란 표현 안에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다.
고로 시민은 '인민'이라 칭함받는 사회의 일원일 수도 있고, '백성'이라 칭함을 받는 사회의 일원일 수도 있다.
| 평민, 백성, 그리고 시민에 대한 이상의 이야기를 토대로
'평신도, 백성, 성도, 그리고 시민'라는 표현에 대해서 궁금증을 설명해 보려 한다.
예슈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은 대개 성도라고 불리는데, 사실 성도라는 단어는 a Saint를 번역한 단어다. 즉 영어권 표현이 먼저 있었고 이를 중국권에서 그리고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a Saint로 칭함 받는 존재들에 대해 영어권의 표현을 따르면 어떤 이들이 검색될 수 있을까?
소위 '성 어거스틴'이라고 불리는 이는 초대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평가받는 이가 있다. 그 당시 어거스틴 외에도 수 많은 신앙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신앙인들을 성도(a Saint)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면, 어거스틴은 'A Saint of Saints'(성도 중의 성도)라 불리는 게 합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즈음에서 성도(Saint)라는 단어를 약간은 규정하고 넘어가야 하리라 본다. 성경에서는 신앙심이 있는 이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불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무리'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신앙심이 있는 이에게 한해서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 외는 '허다한 무리'(또는 신도)라고 표현하려 한다.
| 평신도
평신도의 신도라는 말은 '믿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신도라는 단어에 삽입된 '평'(平)이라는 단어는 앞서 설명했던 평민에서 처럼 계급을 뜻하는데, 믿는 자들 각자의 다름을 무시하고 '모두 균등한 존재'(개체; unit)로 인식하겠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어찌보면 '사역자의 무리와 비사역자의 무리' 또는 '설교하는 자와 설교를 듣는 자'의 구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좀더 부정적인 의미를 덧붙이자면, 콘스탄티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대중들과 동일시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계급적인 요소를 공인된 기독교 안에 삽입하였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근거가 미약하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본 글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논외로 삼는다.
최근에는 '사역자들'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사역자가 아닌 이들을 향해 '신도' 내지는 '믿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게 더 공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믿는 자들의 삶은 모두가 다르고, 믿는 자들 자체도 모두 다르다. 여기에서 그 다름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직책이 나뉘고 그 직책에 따라 행하는 일의 역량들이 분류가 될 때, 그렇게 분류된 소속 안에는 하나의 그룹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어는 멤버(Member)라는 단어가 있다. 최근 교회(공동체) 안에서 흔하게 진행되는 교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소그룹 활동이다. 어떤 곳은 '목장'이라고도 표현하고 다른 곳에서는 '순'이라는 말로도 표현하는 소그룹 활동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 많이 시행되고 있다. 그때 순 안에 소속된 이들을 가리켜 (순의 경우) '순원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계급을 내포하여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순원이라는 말에는 순의 대표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원'(member)이라는 의미를 축약하여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그리고 각자를 소개할 때에는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말한다.
한편 '평신도'라는 단어는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논하였던 것처럼 '개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개체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어떤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임의대로 개체를 선정하고 그렇게 선정된 개체를 해당 부서에 임명하는 게 '평신도'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일까?
대개 교회(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역들을 보면, (목회자 분들이 바쁘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신도들 각자의 특징을 눈여겨 보시는 목회자 분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평신도의 재능 내지는 역량을 눈여겨 보고서 그에 맞는 합당한 사역을 배치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즐거움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평신도의 숫자가 적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재능이나 역량과 상관없이 교회(공동체)의 업무가 맡겨지는 게 일반이다. 소위 '누구 한 명이 목회자의 눈에 들었다' 싶으면, 그 사람이 녹초가 되어 나가 떨어질 때까지 대부분의 업무가 그에게 할당된다. 물론 재능이 있는 부분에서는 아무리 고단할지라도 즐겁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이 없거나 역량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업무를 처리하는 그의 마음에 불편한 심기가 들지 않겠는가?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가령) '믿는 자'라는 단어를 제안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목회자가 '믿는 자'들 각자의 성품이나 재능들을 눈여겨 보는 일에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된 생각이다.
| 중국 역사를 보면,
성군과 폭군으로 칭함을 받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을 논하자면 이렇다.
- 성군은 인품이 좋고,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
그의 인품을 보고서 매력을 느낀 이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곧 특출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해 보고자 하는 이들이다. 재능은 소유한다고 해서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재능에 맞는 업무에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그 기회는 군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재능이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매력을 느낀 군주를 찾아 자신의 재능을 의탁한다. 사람을 보는 눈이란 자신의 인품을 보고 달려든 이들의 재능과 성품 등을 눈여겨 볼 수 있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군주는 신하의 재능을 눈여겨 살펴보고, 그에 맞는 일을 부여함으로써 그 신하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기회를 잡은 그 신하는 누구도 상상치 못할 과업을 달성한다.
한편 폭군은
- 인품도 나쁘지만 사람을 보는 눈이 더욱 나쁘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부와 권력을 탐하여 날아든 파리들을 보고 그들의 재능을 눈여겨 보기는 커녕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 신하를 업무지에 내 보낸다. 그러자 신하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는 커녕 재능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성과가 나쁘다는 책망을 듣게 된다. 일 못하는 신하로 군주에게 찍히기 일수인터라 어느 누가 군주를 향한 충성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라 본다.
사역을 많이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주어진 형편 가운데 우리가 즐겁게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 업무 내지는 사역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겠는가? 예배를 시작하는 중에 마땅한 찬양 인도자가 없다면, 그저 피아노 한 대 또는 노래방 기기를 의존하여 할 수도 있다. 대신 설교자가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 속에서 늘 경험하고 깨닫는 그 기쁨들을 설교 시간에 나눠준다면, 어찌 주변의 상한 심령들에게 홍보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퍼져 나간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 백성 그리고 시민
백성은 앞서 논한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이들을 말한다. 고로 구별된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시민'이라 불리는 것 또한 합당한 이들이다. 이때의 시민은 '하늘 왕국'에 소속을 두는 자들이 된다.
| 성도
성도(Saint)라는 말은 성경 안에서 귀하게 사용되었다. 성도는 쉽게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 자들'(롬12:5)을 일컫는다 할 것이다. 또한 '서로 지체가 된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12:4.개역개정)
기능이란 무엇인가? 기름부음(anointing)을 뜻하고,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말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들이 집회나 또는 예배의 순간에 '내게 기름부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 자들인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3.개역개정)
따라서 기름부음이 각자 다르기에 기능 내지는 담당할 일이 다르다. 어떤 이는 목수로서, 다른 이는 농부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자. 목수에게 농부의 사고력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목수에게 맞는 사고력만 있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농부에게는 농사에 맞는 사고력만 있으면 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기름부음의 특징에 따라 그에 맞는 지혜를 주셨으니, 그 지혜조차도 우리 각자는 분량과 수준, 그리고 영역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음악에 지혜가 임한 이는 소위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평을 받게 될 것이고, 그에 맞는 창의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수학에 지혜가 임한 이는 그에 맞는 창의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언어에 지혜가 임한 이도 그에 맞는 창의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기름부음이 있고, 그 기름부음의 속성에 따라 주어진 역할이 있을 것이니,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합당한 지혜가 임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받은 기름부음은 옆 사람이 받은 기름부음과 비교될 이유도 없고, 비교하는 일 조차 헛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기름부음은 비교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쁘게 열심히 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기름부음에 대해 '수준'을 논하고 '누가 더 큰 것'인지를 다투는 이들이 많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때,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지를 다투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다투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을 기쁘게 복종하며 행했을 뿐, 어느 누구도 크고 작음을 비교하지 않았다. 교회(공동체) 안의 숫자가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떻겠는가? 교회 건물이 화려하면 어떻고 수수하면 어떤가? 그게 천국을 소망하고 예슈아를 사랑하겠다는 그 열정에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저 주께서 내게 5달란트 또는 3달란트를 주지 않았을 지언정, 한 달란트를 주셨다면 그것을 주신 이는 주님이시니 감사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거지 나사로의 삶이 어찌 편했겠는가? 어찌 안락하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거지 나사로의 삶은 현실에서 누리지 못하였는데, 그 사실을 분노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품 안에 거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성도란 그 자체 의미 속에는 '다름'이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이는 백성이라는 단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성도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고스란히 닮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서 높여 부르길 원한다면,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성도'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까?
이제는 마지막 때를 향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는 시대입니다. 곧 마지막 종착지에 도달하기 직전의 시간입니다. 이제는 누가 높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기 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존중하는 그런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평신도라는 표현이 지난 세월 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오랫 동안 쓰임받았지만, 이제는 사라져야 할 단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같은 지체요 형제, 자매라는 생각으로 '성도님'이라 부른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 기대가 됩니다. 그런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