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제안한 의인 10명. 그 당시 아브라함 외에 의인이 있었단 말인가?

| 의인이라 함은 누구인가?

야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다. 그럴 때 우리 믿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슈아를 구주로 영접하는 단계와 성화로 이어지는 삶이 전제될 때, 칭의(의인이라 불림)가 있다고들 말한다.

이때 아브라함의 경우는 갈대아의 우르지역에 있을 때 이미 야훼 하나님을 만났(행7:2)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여정은 이미 영접한 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서신서를 보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2:7~8.개역개정)

따라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사실로서, 아브라함 당시의 의인은 도합 2명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신 야훼 하나님께 뜻밖의 제안을 한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개역개정)

이때 야훼 하나님도 선뜻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용하신다. 물론 아브라함의 무모한 제안은 의인 50명에서 출발하여 45명, 40명, 30명, 20명으로 점점 줄어들다가 마지막으로 10명의 의인이 최종 합의결과로 채택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의인 50명을 말한 의도도 의외지만, 숫자를 줄여나간 그 의도 또한 아브라함 자신도 의인이 자신과 롯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의도하기로는 

"롯은 의인이온데,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라고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19:29.개역개정)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제시하였던 의인 10명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숫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롯 한 명을 구하겠다면서 의인 10명을 제안해?


| 이건 너무나 뻔한 스토리이지 않을까?

과연 소돔과 고모라에는 롯 이외에 의인이 존재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당시 아브라함과 롯 외에 의인은 없었단 뜻일까?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신학적인 논란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는 어떤 사실에 대해 어쩌면 확실한 답변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질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야훼 하나님을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롯은 의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까지 포함한다면, 3명이다. 그 외에 야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은 누가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 그를 포함시켜 보기로 하자. 주인이 믿는 신(God; Elohim)을 믿었을 수 있었으닌까. 그리고 실제 리브가를 데리러 가는 중에 기도하는 모습도 있었기에 이같은 추론은 가능하리라 본다. 이런 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아는 이들을 셈하여 간다면, 결국 아브라함과 롯의 모든 식솔이 해당될 수 있겠다. 그래서 결국 야훼 하나님을 알고 있는 주인을 통해서 '전해듣고 경험하였기에 영접한 노예들'이라는 보편적인 사실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롯의 식솔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당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을 때 구출된 인원은 겨우 4명이었고 그 중의 1명은 도피중에 소금기둥이 되어 버려서 결국 3명만이 구원받는다. 롯의 식솔들로서 롯의 양을 치는 양치기들은 다른 곳에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받았을까?

만일 롯의 양치기들(창13:7)이 양을 치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에 거하지 않았을 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다면? 그럼 이들까지 의도해서 아브라함은 의인의 숫자를 10명까지 제안한 것일까? 그렇지만 실제는 성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구원하는 조건에는 부합되지 못한다. 또 다른 추론으로서 롯의 양치기들은 의롭다고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거민들과 함께 멸망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제안은 물론 그의 제안을 수락하신 야훼 하나님 또한 무모한 거래를 한 셈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는다

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서, 창18장에서 나눈 대화는 큰 의미가 없는 대화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 의미없는 대화나 내용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가운데 필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에 거하는 거민들 중에도 의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안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더 자세하게는 야훼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의인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시선을 돌려 블레셋 지역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던 그 사건 때문에 난데없는 곤욕을 치른 아비멜렉 왕과 그를 책망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대화에 집중해 보길 바란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20:1~2.개역개정)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 이후 아브라함은 블레셋 지역으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아비멜렉 왕이 있었다. 최소 80세가 된 사라의 미모에 아비멜렛은 매력을 느끼고서 자신의 아내를 삼고자 데려간다. 그런데 사라를 데려간 그날 밤에 야훼 하나님께서 나타나(창20:3)신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20:3.개역개정)

야훼 하나님의 엄포에 아비멜렉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잠자코 있지 아니하고 자신을 위하여 항변을 한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20:4~5.개역개정)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말하여 '의로운 백성'a righteous nation이라고 말한다. a righteous nation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Goy'(גּוֹי; nation, people, Gentiles)이다. 즉 한 명을 뜻하는 'person'이 아니라 최소 둘 이상을 뜻하는 'people'로 제시한 것이다.

아비멜렉 스스로 의인의 숫자가 복수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야훼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말을 묵살하고 '턱없는 소리하는 구나'라 폄하 하셨을까?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창20:6a)

아비멜렉의 말을 인정하셨다. 그의 마음을 '온전하다'(tom; תֹּם)이라 표현 또는 칭하여 주셨다. tom(תֹּם)은 어떤 뜻을 갖는지 살펴보자.

'completeness, integrity, also part of the high priest's breastplate'의 뜻을 갖는다. 그 원형인 어미를 살펴보면 'tamam'(תָּמַם)인데 'to be complete or finished'을 뜻한다. 이 단어는 무척 심오하며 중대한 단어다.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단어다.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판명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로움과 악함일진데, 그 순간에 평가된 의로움이란 얼마나 대단한 평가이겠는가? 이와 같은 평가를 아비멜렉(과 또 다른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을 좀더 확대해 보자면, 소알이라는 지역을 거론할 수 있다.
소알은 본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을 당시 함께 멸망받을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창세기 19장.개역개정)
20.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왜 그 성읍은 멸망을 피할 수 있었을까?

롯(과 그의 두 딸) 때문에 멸망을 피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논리를 소돔과 고모라에게도 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소돔과 고모라에는 (소금기둥이 되기 전의) 롯의 아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성은 멸망받았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을 받아야 했는데, 롯(과 그의 두 딸)이 입성함과 동시에 구원받았다.

여기에 두 가지의 추론이 가능하겠다.
하나는 롯과 그의 두 딸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고, 소알 성에는 의인이 없다. 그러나 작은 성이었기에 롯과 두 딸 만으로 그 성은 구원받기에 충분한 의인을 확보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알 성이 작기는 하지만 그 안에 의인이라 평가될 사람들이 있었는데, 구원받기에 합당한 숫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롯과 그의 두 딸이 입성함과 동시에 구원에 이르는 숫자가 달성되어 그 성과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거민들이 구원을 받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가설에는 두 딸의 이후 행보를 비추어 볼 때 논란의 소지가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롯 한 명만이 의인이었다고 의미를 축소해야 그나마 있을 논란을 없앨 수 있으리라 본다. 두 번째 가설에서는 아비멜렉의 경우에서 이미 인지할 수 있었던 사실이 전제로 설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어떤 지역인지 우리는 잘 안다. 그렇기에 블레셋 지역에서 야훼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들 무리가 있다고 한다는 그 자체 또한 놀라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놀라움을 좀더 연장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소알에도 그와 같은 의인들의 무리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야훼 하나님께 제안했던 것처럼, (비록 소알에서는 제안된 숫자가 없었지만)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수준 내지는 합당한 의인의 수가 달성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많은 의구심들이 스스로 생길 수 있으리라 본다.
기존 신학체계에서 파생된 설교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문을 품기를 바란다. 그 의문을 마음에 품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고 그 자료를 놓고 주님께 옳은지 그릇된 것인지를 여쭙는 그런 기도의 시간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의문의 연속은 다음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갈라디아서 3장(개역개정)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사행리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까?
예슈아 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까? 이 사실을 바꿔 말하면, '예슈아'라는 이름 석 자를 안다면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일까?
교회(공동체) 안에서 치뤄지는 세례 의식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공동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증'(certification) 프로그램들이 있다. 그 인증 프로그램을 무사히 수료하면, 어떤 단계의 성도라는 자부심을 갖을 수 있다. 그래서 각종 인증 프로그램들을 섭렵하듯 수료하는 이들이 있다. 최소한 자신의 교리 안에서 안심할 수 있는 지경 내의 교회(공동체)가 진행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이때 그의 구원이 인정받을 수 있을까?

중세시대 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다. 무수히 많은 수입을 올렸기에 성당의 창고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재물들로 가득해 있었다.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시오, 아퀴나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 ’라고 말했던 초대교회와는 달리 우리에겐 금과 은이 이렇게 풍성하오.” 

그말에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금 기둥을 세우고, 대리석 바닥을 꾸몄습니다.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많은 땅과 건물도 있고,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풍성하다고 외칠 만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일학교는 물론 중고등부와 청년부의 숫자는 턱없이 줄어들어 급기야 미전도종족의 수준과 유사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풍성한 외모를 가진 교회(공동체)의 현실인데 우리의 자녀들은 왜 교회의 문턱을 넘으려 하지 않고 세상과 함께 교회를 향해 비난과 조소를 날리는 것일까?

공화문의 동성애 퍼레이드 현장에 나가보면, 솔직히 신앙인 부모를 가진 청년들이 그 현장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동성애의 반대를 외치는데, 정작 그 자녀들은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한다.



율법은 교리라는 매우 체계적인 단계로까지 발전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삶 속에 뿌리깊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교회(공동체) 안에 있던 부흥의 물결은 서서히 말라가 버려 이제는 야훼 하나님을 대적하는 흐름으로 편승하는 이들이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율법을 강조하던 교회(공동체) 안에서 메말라 버린 진정한 능력은 무엇이었을까?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행위로 강요하려던 부작용은 없었을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진데, 지금까지 교회(공동체)안에서 행해져 왔던 그 많은 행위들은 어찌하여 우리 자녀들에게서 조차 외면을 받아야 만 했던 것일까?

아비멜렉과 그의 성 안에 거룩한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그곳에서 출현한 의인의 소식은 잠자던 우리의 영성에 경종을 울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찌 아브라함의 집안 사람이 아닌 자에게서 '온전한 마음'을 가진 이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1:46.개정개역)

우리들의 이같은 편견을 넘으시는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이제는 인지해야 할 때가 되었지 않았을까? 광화문을 찾아 하늘 높이 외치는 소리가 동성애를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성세대의 외침으로 동성애를 물리쳤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어느 누가 외쳐줄 수 있단 말인가?

| 다음세대와의 연결고리를 상실해 버린

오늘날의 교회(공동체) 현실은 이같은 우려의 목소리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 설 순 없지 않는가? 대안책을 강구하고 돌파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율법이 있기 이전에 이미 성령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모습을 우리들 각자가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율법이 없는 가운데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었겠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 동행했음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아비멜렉은 무엇으로 짐작할 수 있을까?

양심을 기억하자.
양심은 창조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신 그분의 음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를 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이신데,10) 그분은 사람이 만든 교리와 계명이 그분의 말씀에 어떤 면에서든 상반되거나, 또는 신앙이나 예배의 문제에 거슬린다면 그것으로부터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11) 그러므로 양심을 떠나 그런 교리를 믿거나 그런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12) 그리고 맹신이나 절대적인 맹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또한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다.13)
God alone is Lord of the conscience,[10] and has left it free from the doctrines and commandments of men, which are, in anything, contrary to His Word; or beside it, if matters of faith, or worship.[11] So that, to believe such doctrines, or to obey such commands, out of conscience, is to betray true liberty of conscience:[12] and the requiring of implicit faith and absolute and blind obedience is to destroy liberty of conscience, and reason also.[13]

10) 약4:12; 롬14:4
11) 행4:19; 5:29; 고전7:23; 마23:8-10; 고후1:24; 마15:9
12) 골2:20,22-23; 갈1:10; 2:4-5; 5:1
13) 롬10:17; 14:23; 사8:20; 행17:11; 요4:22; 호5:11; 계13:12,16-17; 렘8:9
라고 되어 있다. 


| 이제는 양심을 회복해야 할 때라 믿는다. 

누구보다도 선한 양심을 되살려서 세상의 요구에 부합할 때이지 않나 싶다. 양심을 따라 사는 이에게는 의도된 행동이 없다. 그저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 변화에 수긍하는 순종만이 있다.  



그러니 어느 누구든 그의 순종에 감동을 받게 된다.


'양심이 말라버린 세상'에 양심을 회복하는 우리 신앙인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세상에 우리를 통해 양심의 소리가 선한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슈아의 이름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음을 증거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본 세상이 "당신들을 통해 예슈아의 모습을 보았노라"는 고백이 있을 수 있도록 오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심리………를 정확히 지적한 댓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과 휴거는 예루살렘 성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의외의 장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