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까?

예슈아께서 하신 말씀 중에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8:35
라는 부분이 있다. 이 말씀은 정령 어떤 뜻일까?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17:33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자결할 만큼 충분히 하찮게 여기라는 뜻일까?
깨미와 첫만난 그때의 모습

어느날 내게 날지 못하는 '아기 산까치'(어치)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길고양이로부터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집으로 데려왔지만, 나는 애완동물을 키워 본 적도 없고 그들에 대한 애착심도 갖고 있지 않은 터라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기 새는 어린데다 배고픔이 더하여 발과 날개짓 그리고 목소리에 힘이 별로 없었다. 주변 세상의 두려운 환경 속에서 어린 것이 얼마나 힘겨워 했는지 나를 심히 경계하였다. 

마침 부엌에서 카레밥을 요리하려고 잘게 조각난 돼지고기를 준비해 놓았길래 그 중에서 한 조각을 얻어 와 먹였다. 먹이를 주는 나를 경계하랴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터라 아기 새는 물론 나 까지도 힘든 식사 시간이었다. 어색했던 식사 시간이 지나자 아기 새는 조금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내가 손을 내밀자 아기 새는 내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순간 내 손을 어미의 품으로 여기는게 아닌가 싶어서 한 손으로 살포시 품어 주고나니 이내 곧장 평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

이같은 첫만남 이후 아기 새에게 새장을 가져다 주었다. 나름 잘 키워 보겠다는 취지에서. 그런데 아기 새는 새장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컸다. 어쩔 수 없이 큰 종이 상자를 구해와서 숨 구멍을 내 주고 그곳에서 재웠다. 하룻밤을 자고 나자 아기 새의 목 놀림이 어제보다 훨씬 당당해지고 힘차 보였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걱정했던 내게 작은 소망이 엿보인 순간이었다.

아기 새에게 관심을 두고 관찰하듯 매사에 행동 하나 하나를 살핀 나는 어느새 아기 새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까미(아기 새 이름)가 목이 마르구나.'
아기 새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까미가 배가 고픈 것이구나.'
밥을 먹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고 나니

'까미가 배부르다는 것이구나.'
하는 등의 아기 새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기 새와 나의 어색한 동행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오늘은 집에 온지 벌써 6일째가 되었다. 날개짓이 심히 힘차 보였고 내 팔뚝에 내려앉을 때 발톱의 힘은 무척 강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아기 새가 야생으로 돌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 첫단계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먹이를 주되 새의 입 안에 먹이를 넣어주던 평소의 방식을 버리고 오늘부터는 바닥에 먹이를 놓고서 스스로 쪼아먹게 했다. 물론 2일 전부터 아기 새가 부리를 이용해서 방의 바닥을 쪼아대는 모습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기에, 이같은 훈련은 순차적인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먹이를 받아먹다가 스스로 먹어야 하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에 아기 새는 바닥에 놓인 먹이를 곧잘 먹으려 하지 않았다. 배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나를 보고 소리만 칠 뿐이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내 마음을 절제해야만 했다. 내 눈에서 긍휼을 제거하고서 '배가 고프다면, 스스로 먹이를 주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는 훈련을 이어나갔다. 평소 먹이를 먹여줄 때 나무 젖가락을 어미의 부리인양 사용했다. 그래서 아기 새는 벌레보다는 나무 젖가락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는 편이다. 이를 인지한 나는 투명한 플라스틱 작고 낮은 상자에 미럼(벌레)를 넣고서 바닥이 투명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그 바닥에 나무 젖가락을 놓았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아기 새는 움직이고 있는 미럼을 보게 되었고, 배가 고팠던 그는 서슴치 않고 미럼을 잡아 먹을 수 있었다.

이로써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첫훈련은 나름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이같은 경험은 아기 새에게 교훈을 주기보다는 나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왔다.

주님은 나를 좁은 길을 통해 주님이 계신 좁은 문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신다. 이를 위해 평탄한 삶을 살던 내 삶은 허물어져 간다. 그리고 힘든 역경의 순간으로 접어든다. 이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의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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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나는 세상 어디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가 되었어. 이제 생을 마감함으로써 더 이상 치욕스러운 내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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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하지만 난 살고 싶어. 살아야만 해.'
'가만히 생각해 보자.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 예슈아만 믿으면 그분은 나를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했다.'
'모두가 할 수 없다고 내게서 손을 뗀 이 상황 속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 하나만이 남았구나. 내 모든 것을 예슈아께 맡기겠어.'
라는 또다른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가 있다. 중증근무력증을 앓게 된 필자는 바로 후자의 경우를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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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 귀한 간증들을 들어보시면 그 안에서 '나는 살고 싶다.'라는 한 줄기의 소망이 그를 절망에서 이끌어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다시금 되물어 보게 되시길 강권합니다. 

|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막8:35)의 말씀과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눅17:33)의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

개인적인 소견일지는 몰라도, 제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에 관한 경고라고 말이죠. 즉 제 개인의 버전으로 성경 말씀을 다시 기록하자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5.개인버전)
무릇 자기 목숨을 (스스로)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17:33.개인버전)

크게 바꾸지 않았습니다. 다만 '스스로'라는 표현만 삽입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불분명하게만 느껴졌던 예슈아의 말씀이 너무나 명확해졌다고 느껴지지 않는지요. 성경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간증들을 듣고 있노라면, '저 간증은 무언가 이상하지 않아?'라는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같은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대개 간증을 버립니다.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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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모든 말씀들에 대해 온전하게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도 성경 말씀 혹은 성경 속의 '단어 하나에 깃들어 있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의도 100%'를 들려줄 수 있는 이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부분적으로만 예언합니다.

정육면체(사각형 박스)를 우리 앞에 두었습니다.
한 순간에 정육면체의 6면 전부를 볼 수 있는 이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Absolutely Not!

절대 불가능하며, 그걸 가능한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보는 이가 6면 중에 1면 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합니다. 이처럼 '안다'고 말하는 이들의 설교를 들으실 때,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시면서 들으시길 강권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간증을 듣고 난 성도들에게는 그 목회자가 들려준 천국과 지옥 말고는 그 어떤 천국과 지옥의 모습조차도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단코 미혹입니다.

코끼리는 무척 큰 동물입니다.
한 눈 먼자가 코끼리의 다리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외칩니다.

"야호! 나는 코끼리를 만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눈 먼자가 묻습니다.

"네가 만진 것이 코끼리(전부)야?"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옳은가요?

"응. 코끼리는 별거 아니군. 거대한 기둥처럼 생겼어. 이게 다야"
이같은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볼 수 있는 자는 어떻게 생각할 까요?

"코끼리는 기둥같다는 느낌은 사실입니다. 팩트죠"
"하지만 놓친게 많답니다.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코끼리의 일부분들은 더 많기 때문이죠"

2019년의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흔하게 회자되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팩트'(fact;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팩트는 전부가 아닌 '일부분'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사건의 모든 전모는 진실(tru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는 허다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이렇게 모인 증거들이 서로 합력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고로

Fact is not Ture
Fact is one of apart of True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길 강권합니다.

왜 소중히 여기라고 할까요?

예슈아께서 사랑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바꿔야 할 만큼 아끼는 생명인데, 소중히 여기면 저주가 될까요?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처럼 생각한다면, 우리가 성경, 곧 예슈아께서 하신 말씀의 본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다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연이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을 지킬 능력이 전무한 것처럼. 그래서 부모가 어쩔 수 없이 돌봐야 하죠. 따라서 지혜로운 아기는 자신의 생명을 부모에게 의탁하는 자입니다. 이건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고로 나의 가장 소중한 이 생명은 가장 능력 있는 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그런 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목회자도 아닙니다. 은사자도 아닙니다. 그들도 자신의 생명조차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직 예슈아께만 맡기십시오. 그분에게만 생명을 의지하십시오. 그길만이 그래서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됩니다.

Photo by redcharlie on Unsplash

아기 새가 '내 손'을 떠나 생명이 있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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