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9의 게시물 표시

히브리어를 소유한 유대인. 그 놀라운 비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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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lexander Andrews on Unsplash |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그 상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진다. 우리는 이렇듯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그런 '시공간'(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간다. Photo by Jade Stephens on Unsplash |  우리의 살아가는 소소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화가는 자리를 펴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 낸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고, 이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지만 화가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 가운데서 몇 가지의 포인트들 만을 택하여 자신의 그림으로 옮겨 실는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Photo by Clem Onojeghuo on Unsplash |  화가의 그림을 보게 된 철학자는 그 안에 무수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진리가 무수한 것들 안에 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 철학자는 그림 속의 그 신비로운 진리를 언제고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림 자체는 너무 크고 버겁다. 아울러 자신이 다시 그린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을 철학자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단순하지만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그리고 어느 누구도 쉽게 그 그림 속의 의미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Photo by Giammarco Boscaro on Unsplash |  철학자는 자신의 책상에 작은 네모난 하얀 종이 하나를 펼친다. 화가의 입장에서는 그림 속의 작은 돌멩이 하나도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철학자의 입장은 다르다.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과 중요하지 않는 그래서 부수적인 것들로 나뉘어진다. 그림 상황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지는 않은 수준에서 신비로운 진리를 중심으로 꼭 필요한 몇 가지 요소만을 택

예언을 듣는 자는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예언을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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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Zoltan Tasi on Unsplash | 예언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예언을 사모하는 이들을 보면, (이것은 신앙을 떠나서) 장래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가치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같은 이유에서 세상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예언의 형태를 취한다 싶으면 그것은 단연코 통계(statistics) 다. 통계가 사용되지 않는 부분이 과연 몇 개나 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각자만의 통계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일례로 간판을 제작하시는 고졸 출신의 사장님의 경우를 보면,  "이 업종에는 이러한 색상을 사용하시는게 가장 무난합니다." 라는 말을 주로 한다. ' 무난하다 '는 표현은 '통계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 결과를 알 수 없겠지만, 장래 개업하고 난 이후에 손님들의 반응을 통해 알게 될 사실로서 '호의적인 평가'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건 많이 배웠느냐 혹은 어떤 신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말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해당 분야에서 나름 성실하게 일해 온 분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통계적 발언이다. 통계 또는 예언이란 이처럼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 난무하리만큼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Photo by Angela Compagnone on Unsplash 그런데 우리는 예언이라는 단어에 몹시도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칫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 손 싶으면 불편한 마음을 감추질 못한다. 그 이유는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예언은 일상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것으로서, '야훼 하나님의 경건하심에 관련된 사역에만 관련된 내용들이다'라고 여기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앞서 설명했듯이 '누구나 통계적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실제적 사실과 다르게, 교회(공동체)안에서는 '예언이란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얻게 될 기업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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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사에 '고개지'라고 하는 동진시대의 화가 이야기 중에서 비롯된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점입가경'이다. 평소 '가느다란 가지'부터 먹었던 고개지의 모습을 본 친구는 "자네는 왜 가느다란 가지부터 먹는가?"라고 물었다. 사탕수수의 가느다란 가지 부분은 맛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지의 대답을 들은 그 친구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 그야 점점 갈수록 단맛이 더하여 지기 때문이지 " 점(Dot)과 같이 매우 하찮게 여길 수 있을 만한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진행하는 일인데, 점점 더 크고 놀라운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Photo by kazuend on Unsplash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8:7.개역개정) 의 말씀은 점입가경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성경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토대로 '미약한 출발'을 가졌던 인물을 떠 올려 보자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개역개정) 그렇다. 메시아를 향한 예언 자체도 그의 시작은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   물리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인 개념에서 점(dot)에 대한 이해를 얻자면, 점이란 크기는 없고 다만 위치만 있는 것 이라고 설명한다. 크기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값어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의 존재(위치)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존재의 가치 또는 그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여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점(Dot)의 인생일지라도 충성하고 성실한 모습을 지켜 행하자,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으며 측정할 자가 없는

전능하신 분에게 있어서 우리 모두는 그 무게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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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은 자를 능히 살릴 수 있다. 전혀 어렵지 않게. 그는 거대한 나라 하나를 소멸하거나 다시 세우는 것조차도 능히 하실 수 있다. 전혀 어렵지 않게. 그런 분에게 우리는 서슴치 않고 다가갈 수 있는 담대함이 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 된 우리가 ' 삶 속의 지극히 사소한 작은 일 ' 에 대해서 전능자와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면, 그 일은 나라를 살리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일보다 하찮은 게 아니다. " 아버지. 짬뽕을 먹을까요? 짜장을 먹을까요? " 라는 작은 물음에도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신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으시고.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분에게는 그 어떤 업무가 자녀보다 클 수 있겠는가? 자녀보다 큰 업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능자는 스스로 모든 일을 독불장군처럼 행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리 하지 않으신다. 자녀인 우리에게도  "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 라고 물으신다. 나의 생각에 대해 '그와 같은 가치'를 두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의 구원 또는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만이 야훼 하나님의 크고 온전한 뜻이라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삶의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님께 사실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마음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큰 일에만 충성하면 되고, 삶의 소소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마음은 여러분의 인생을 썩게 만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마25:21a.개역개정) 전능자에겐 크고 작은 일이 따로 없다. 모두가 비중이 같기 때문이다. 그분의 능력에서는 모든 일들이 손쉽다

예언을 하는 자와 예언을 듣는 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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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에서 소개된 내용을 잠시 나누고자 한다. 여인은 예언자이며 오일을 뒤짚어 쓰고 있는 남자는 예언을 듣는 자다. 여자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서 위험에 처한 남자를 구할 거라고 예언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자는 단호하게 자신의 예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신이 보았던 예언의 내용은 부분적인 내용일 뿐이라고. 그럼 부분적이라는 그 의미는 무슨 뜻일까? 예언이란 예언을 듣는 자와 함께 이뤄나가는 것 이란 뜻이다. 무수히 많은 예언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 예언이 자신의 삶에서 성취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의 삶에서는 어떠한 예언도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들은) 그 예언이 성취될 수 있도록 '피 흘리기 까지' 노력한다면, 그는 자신이 내딛고 있는 그 땅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여러분. 게으른 자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예언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언을 들을 당시 '아멘'이라는 힘찬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성취되는게 아니란 뜻입니다. 예언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삶을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산제물'로서 바쳐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당신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은혜를 나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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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법화경이라는 불경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라 한다. 만물의 이치, 곧 만물 가운데 숨겨 놓으신 야훼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의 수준으로 다가간다면, 세상의 어떤 명언들이 사람에게서 낳을 수 있겠는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의미는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헤어진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은 극명하게 다른 존재지만,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에하드)란 뜻이다. 남자와 여자를 각기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각자만으로는 생명을 낳을 수 없다. 고로 남자 혹은 여자라는 개별적인 상황에서의 '사람'이라는 개념은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2:7a.흠정역 의 말씀처럼 생기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함으로써 이루는 '한 몸'(에하드)는 생명을 낳을 수 있으니,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 살아 있는 혼 " 이 되니라. 창2:7b.흠정역 이때의 온전한 하나는 비로서 '살아있는 혼'이 된다. 이 또한 '사람'(adam)이라 불린다. 만남과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홀로 존재하는 만남 또는 헤어짐 만으로는 인간관계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없다. 생기는 만남과 헤어짐이 늘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만남 만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성도가 이웃 교회(공동체)로 이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행여나 이적하는 일이 생겨나면 그것은 선한 것을 빼앗는 악행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프레임에서 이젠 벗어나서 자유할 수 있기를 바라자. 행여 지옥으로 향한다면 모를까 성령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이적하는 이를

[예슈아의 비하인드 스토리] 당신은 예슈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허다한 군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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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설교자 설교 또는 은사자의 간증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곤 한다. 성경 66권 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꿈과 환상 등을 통해 천국과 지옥 등을 경험하면서 예슈아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것이라는 내용들에서 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만 나고 자란 이가 미국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개하면 매우 괴이하거나 이색적이라며 놀랄 순 있다. 하지만 자초지정에 대한 설명 곧 상세한 설명을 충분히 할 경우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그럴 때 납득하기 어려운 낯선 사실에 대해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게 된다. Photo by Jordan Pulmano on Unsplash 그런데 상세한 설명도 없으면서 '그냥 믿어라!'고 한다해서 믿어질까? 납득할 수도 없는 사실에 대해 마치 마인드컨트롤(최면)을 하듯 '그래. 나는 믿는다. 나는 믿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 그게 믿어지던가? 예슈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사실에 대해 예슈아는 어떻게 대하셨던가? 예수께서...(중략)...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눅22:40~42.새번역) 이 대목에서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신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고 그렇게 설교를 들어 왔으며 배워왔다. 그런데 예슈아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익히 보아 왔었지만, 눈여겨 보지 않는 그 대목. "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 ( if thou be wil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