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시대의 밤에 피는 장미
필자가 인도네시아의 반둥 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이야기다.
4 시간 정도를 이동하여 늦게 반둥의 숙소에 도착했다.
커다란 창문이 달린 게스트 하우스의 어느 방에 여장을 풀었는데, 몸이 너무 피곤했다. 반둥은 고산지역에 위치한 도시라서 그런지 몰라도 두통도 심했다. 팀원들과 모임을 갖기 보다는 그냥 잠자리에 드는게 팀을 돕겠다 싶어서 잠을 청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무언가가 비늘 봉지에 "툭"하고 떨어지는게 아닌가.
떨어진 무엇은 봉지를 벗어나기 위해 요란을 떨는 것이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로서, 나는 너무 놀랬다. 놀란 마음을 추스릴 겨룰도 없이 내 몸은 본능적으로 불을 켰다.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의문의 소리는 내 몸의 모든 신경을 곤두 세우기에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신발을 신고 소리의 근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비늘 봉지에서의 몸부림이 잠잠해 지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안을 살포시 내다 보았다. 동남아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도마뱀"(또는 도룡룡)이었다.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비닐 봉지를 들어 화장실 변기 안에 털어 내었다. 그리고 그 도마뱀을 변기의 물과 함께 밖으로 흘려 보내 버렸다.
이후 내 안의 피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극도의 긴장감만이 감돌 뿐이다. 필자는 작고 꿈틀대는 것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편이다. 침대에 눕는 것 자체도 꺼려졌다. 그래서 방 안의 불도 끄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별안간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 "방안의 불을 꺼 보겠니?"
▶ "도마뱀이 나타날까봐 두려워요"
▷ "걱정하지 말고 불을 꺼 봐"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하고서 방 안의 불을 껐다.
눈을 감지 않았지만, 불을 끄자 사방에는 칠흙과 같은 어둠이 밀려 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걱정하지마. 내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단다."
어둠에 익숙(친밀; intimacy)해 지면서 나는 무언가를 조금씩 볼 수 있었다.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마치 영안이 열리는 것처럼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서서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눈이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지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마음이 내 심령을 가득 매웠다.
방 안의 불 빛이 켜져 있을 당시에는 "창 밖의 모습"은 칠흙과 같이 어두울 뿐이었다.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방 안의 불이 꺼지고,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창 밖에는 "빛을 내는 것들"로 가득했다. 온 주변을 마치 작은 불 빛들로 수 놓은 듯, 칠흙과 같던 그곳에서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작은 불 빛들을 볼 수 있었다.
▷ "봐라. 내가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 "가장 큰 빛이 너에게서 사라질 때, 너는 생각하겠지. 온 세상은 어둠에 사로잡힐 거라고."
▷ "심히 두려운 나머지 무엇을 해야할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그런 나약한 자가 될거야"
▷ "하지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나의 작은 불 빛들을 숨겨 놓았단다"
▷ "바로 너가 능히 볼 수 있는 저 곳처럼, 바로 너의 앞에"
그 순간 내 안에는 큰 깨달음이 밀려왔다.
'주님의 작을 불 빛들은 내 삶 속에 숨어 있었구나'
'그런데 더 밝은 주님의 빛이 덜 밝은 그 불 빛들을 오히려 숨기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밝은 빛이 밀려나야 비로서 내 삶의 작은 불 빛들을 볼 수 있는 거구나'
그렇다.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을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빛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낸다고 여김을 받지 못한다. 태양이 사라져야 그 순간에 어둠이 밀려 오면서, 그 어둠에 의해 작은 불 빛들도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적 거장 엘리야 시대.
그의 영적 밝음 아래에서 어떤 이들이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공동체)의 기도 모임 중에서, 하루에 10시간을 기도하는 권사님이 계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 권사님보다 기도에 열중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 권사님이 없어지면, 그래서 기도하는 또 다른 무리들이 있는가 하고 찾아본다면, 우리는 각자의 처소에게 다양하게 기도하고 있는 허다한 지체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적 거장이 있을 때, 우리는 환한 밝음을 맘껏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직 그 거장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 유일한 사람으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모든 신앙적 권면이나 위로 등의 말조차도 오직 그 한 사람의 말만 듣고자 열심을 낸다. 다른 이들의 권면이나 위로는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게 옳다고 여겼다.
"설교는 신학을 배우신 분들만 하는 겁니다."
"영성이 낮은 자는 함부러 성경을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우리의 도움은 저 목사님(또는 은사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라지게 되는 순간은 옵니다. 그것도 반드시.
그러면 우리는 매우 두려워 합니다. 깊은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침식해 버릴 거라는 염려 섞인 예측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특히나 성도들을 향하여
"이제 곧 너희들은 어둠의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금껏 세상을 비추던 그 빛이 사라지게 될테닌까"
"그러면 너희는 더 이상 그 어떠한 빛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요 창조의 질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태양이 모든 것을 비추기에,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빛을 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태양이 사라지는 큰 환난이 오면, 태양 외에도 허다한 것들이 빛을 밝히는 존재인 것을 또는 창조주께서 그런 존재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가 있느니라
(롬 11:5)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의 은혜도, 그래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숨겨진 채 남겨진 이들도 영원하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어느 누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봐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뽐낼 수 있는 그런 빛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다르다.
"밤에 피는 장미."
그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충분한 빛이 있음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Staring photo by Max Saeling on Unsplash |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