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8의 게시물 표시

나는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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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연산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학문이다. 그래서 연산이 가능한 수와 연산이 불가능한 수는 큰 차이가 있다. 모든 학문은 연산 가능한 수 또는 연산 가능한 현상에만 가치(value)를 둔다. 그것이 "진정한 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산이 가능한 사회적 현상을 볼 수 있는 자는 " 돈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자 "다. ☞ 수(numbers)와 숫자(word)의 차이를 아시나요? 물리학은 장차 일어날 일을 능히 예측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그는 돈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서, 그 중간 길목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몫을 챙길 줄 아는 자 다. 그렇기에 "수학과 물리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자는 "진정한 재물"을 향해 자신의 모든 삶을 투자한다. 모든 학문 또는 삶의 다양한 직업들은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측할 수 있다. 다만 전심으로 그 학문을 익히는 자들에 한해서. 그래서 삶 속의 달인들은 어떻게 하면 장차 올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심지어 악행하는 이도 그렇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그 길목에 행인들이 올지 오지 않을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아프게 한다는 그 사실도 예측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들 모두는 장차 다가올 일에 대해 예측(예언)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각자의 모양대로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영적 능력들을 예슈아의 이름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와 자신의 소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자, 오직 그 두 가지의 차이만 있다.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할 수 없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동안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결과가 당신의 주변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예언할 수 있는 자입니다. 어제도 예언했었고, 오늘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자 그리고 세운 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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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pixabay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성과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그의 발견을 아주 냉소적으로 비난하듯 평가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저 바닷가의 해류를 따라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기만 하면 찾을 수 있는 땅인데, 그딴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호들갑일까” 잔치 분위기를 차갑게 만든 그들의 말에 콜럼버스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 달걀을 세울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있습니다. ”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제안으로서 “어느 누구도 이 달걀을 세울 수 없다”고 항의하듯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할 뿐이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세운다'는 보편적인 생각 으로는 절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생각을 벗어난다면? 즉 달걀의 한쪽을 깨뜨리겠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을 당당하게 벗어나는 있는 자는 너무나도 쉽게 달걀을 세울 수 있음을 보였다. 허무하다 할 만한 이 상황에 맥이 빠진 듯 쳐다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콜럼버스는 짧지만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 알고 나면 간단한 일입니다. ” “ 하지만 내가 보여주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무척이나 힘든 시대입니다. 무엇 하나 해 볼려고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경제활동은 어쩔 수 없이 레드오션(red ocean) 안에서 벌어지는 각축전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러한 상황들이 "사회 또는 현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자에게는 어떻게 보여질까? 나도 어렵고 모두가 어렵다고 말하는 그 분야에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있다. 서로의 상황과 형편이 다른데, 그 상황 속에 있는 우리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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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ty-free와 Duty. 어느 것을 선호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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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을 여행하려 갈 때면 긴장하듯 큰 기대감을 가지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면세점이다. pixabay (below all) 그런데 그곳은 아무나 입장 가능한 곳이 아니다. 공항에서 출국장으로 나갈 수 있는 " 자격을 가진 자 "에게만 허락 된다. 그러나 무한정 구매활동을 펼칠 수는 없다. 구매할 수 있는 수량에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시민이라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납세의 의무". 허나 그곳에서만큼은 면제다. 그랬더니 누구나가 앞다투어 원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소비자는 구매를 위해서, 기업들은 판매를 위해 기필코 입점하고자 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여러분. 단순한 소비활동이 펼쳐지는 그런 현장에서도 " 의무를 면제받는다 "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 인지 충분히 실감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의무인데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면제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기뻐하는 사실인 것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의무를 면제 받는다는 사실은 어떤 시민이라도 "가장 선호할 만한 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면제를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소위 잘 나가는 그런 류의 삶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소외감을 체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의 삶. 과연 얼마나 가냘프고 안타까움에 몸부림치고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세점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납세의 의무로서) 물품에 부과된 세금을 지불하는 그런 류의 구매활동에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죠. 선택의 폭이 없었다면 모를까, 마음을 추스리고 보면 자신의 주변 곳곳에서 구매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5일장이라는 구수한 여유로움을 누릴

위정자들의 직무유기를 책망하는 현세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질문. 율법은 폐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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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인 에 대해선 "마땅히 행해야 할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직무유기를 부당한 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가 지닌 권세와 권리를 박탈하였다. 또 어떤 정치인 은 "마땅히 행할 업무 이외의 것"으로서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을 마치 자신의 권한 아래에 있는 것으로 여긴 일이 발각되었다. 수하 직원을 마치 몸 종처럼 취급한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권한 남용"이라는 이유로 그가 지닌 권세와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행하지 않았을 경우 , 그리고 맡겨진 직무 영역을 벗어나면서까지 타인의 영역을 침해한 경우에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의 권세와 권리"가 박탈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인정하는, 그리고 그 세상 안에 거하는 믿음의 지체들 조차도 합당하게 생각 하는 "상식"(common sense)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이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모든 교회(공동체)는 직분자를 세운다. 모든 목회자 분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교회(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반드시 직분자를 세운다. 이 사실을 그릇되다고 여기는 목회자, 신학자, 또는 성도는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인정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 허다한 성도들 가운데, 특정인이 지명된다. 지명된 그에게는 "직분"이 부여된다. 이 직분은 교회(공동체)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헌신을 이룬다. 그래서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 이 있으니, 그것은 "직분의 직무"를 마땅히 행하여야 한다 는 것이다. 담임 목회자께서 직분자를 세우는 중에 "선서"와 같은 "스스로의 고백"을 요구하는 것도 직분의 직무를 반드시 수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직분"을 받는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직무"

마지막 때 발전해야 할 Interface 기술은 결국 베리칩을 구하는 세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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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nny Caspari on Unsplash 전기(Electricity)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이 있다. (+)와 (-)라고 불리는 전기의 두 극성이 그것이다. 이 둘은 너무나 달라서 심지어 둘이서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금지된 만남을 무시하고 (+)극성과 (-)극성이 서로 만나려하면, 둘 사이에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불길"(esh; אש)이 일어나 버린다. Photo by Emil Jarfelt on Unsplash 그렇게 일어난 불은 온 세상을 태워버릴 기세다. 어느 누구도 그 불길을 품을 수 없다. 그 결과 온세상을 태우고 난 그 불은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 자신 혼자만 남게 된다. 하지만 (+)와 (-)극 사이에 노역(Load;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저항(Load; resistance)을 놓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pixabay (below all) (+)와 (-)가 다스려진다. 그 다스려짐은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우리들)은 (두 극성을 가진) 전기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극명하게 다른 두 존재(극성) 사이에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중재(중보)를 나서게 됨으로써, 공존할 수 없는 세상을 능히 공존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존재를 신앙의 측면에서는 중보자로 칭하는 반면, 과학기술에서는 Interface(인터페이스) 기술이라 말한다. 극명하게 다른 두 지역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서 공존하는데, 이 경계를 Interface(계면; 경계면)이라고 말한다. 인터페이스 기술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진영 사이에 놓여서, 둘 간의 정보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정보교환은 다른게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인간으로 합쳐질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 정보교환을 할 수 있다. 음성으로. 이러한 정보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