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의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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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하나의 존재로서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알고 보고 '남자와 여자'라고 한다. 이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상형문자는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형상화 하고 있다. 한자 사람 인(人)에는 긴 획 하나와 짧은 획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두 획이 "사람 인"(人)자 하나를 형상화 하고 있다. 서로 다른 두 획이 하나의 문자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하나의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게 창1:27의 사람에 관한 설명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다. 그 형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내포되어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 을 가리켜, 그분의 형상을 담고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바꿔 사람의 마음 으로 말할 수 있고, 이것을 좀더 축약해서 표현하면 사람(人)의 마음(心), 곧 인 (人) 심 (心) 이라 할 수 있다. 인심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후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남을 챙겨주는 마음 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타인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려 하는 사람의 마음 을 가리켜 #인심'이라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인심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마7:12 이것을 율법 #Leb; #Heart_of_the_father 이라 말한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넉넉하게 대접을 받고 싶다. 그렇다면 먼저 해야 할 것은 "타인을 먼저 넉넉하게 대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넉넉하게 챙겨주면 좋을까? 넉넉하게 챙겨준다는 의미는 물질적인 부분도 있지만, 마음의 부분도 있다. 그리고 두 부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위로"를 챙겨주는 것이다

나는 서 있는 건가 아니면 누워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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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우주. 그곳에 내가 있다. 혼자서. 내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어둠만이 있다. 그때 나는 생각한다.  나는 서 있는 걸까?   누워있는 걸까? 아무것도 없는, 곧 나의 모습이 서 있는 지 혹은 누워있는 지를 분별할 수 있는 비교대상이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서 있는 걸까? 아니면 누워있는 걸까? 어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다. | 홀연히 나타난 비교대상 그가 스스로 말하길 '나는 기준이다'라고 한다. 즉 그는 위와 아래, 앞과 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누어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그가 나타나자, (서 있는 지 혹은 누워있는 지를 알 수 없던) 나는 누워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기준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이미 누워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준이 없었기에 누워있었으나 누워있다고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혼돈만이 가득하던 이 세상에 기준이 나타났다. 그 기준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워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누워있는 지 혹은 거꾸로 뒤짚혀 있는 지 조차 알지 못하던 허다한 이들에게도, 기준이 홀연히 나타나자 그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환히 밝혀졌다. 그러자 자신이 서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던 이들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알게 되고 기준과 기준이 들려주는 모든 사실을 자신의 마음 중심에 영접한다. '기준은 모든 것의 옳음이다'라며. 그리고는 지난 날 틀린 사실을 주장하던 자신의 행함에 대해 주변에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고, 이후부터는 기준에 맞춰 자신의 상태를 판단하여 말하는 자가 되었다. 기준이 서 있다고 말하면, 자기의 상태를 서 있다고 말한다. 기준이 누웠다고 말하면, 자신의 상태는 현재 누워있다고 말한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저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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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는 저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저주의 형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무엇이 어떻게 생긴 게 저주라는 식의 설명이 없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무엇이 죄다'는 식의 죄의 실체를 설명하는 부분은 없다. 왜 그럴까? 이는 죄나 저주의 형태 또는 특정한 행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즉 우리가 죄나 저주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죄를 짓지 않고 저주를 대적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죄나 저주를 바라보는 순간, 죄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리라. 그것은 보는 순간, 묶인다. 따라서 죄나 저주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고 본다. 무엇이 유일한 방법일까?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죄 또는 저주라는 부분에 있어서, 특별히 영적인 사람에 한해서만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성도조차도 목회자나 은사자를 찾아가 곧잘 묻곤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게 잘한 것일까요?"     "제가 죄를 지었거나 저주받을 만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요?" 이러한 상황은 매우 흔하디 흔하다. 심지어 누군가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이내 곧잘 죄를 자복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자녀들이 세상의 유행가를 즐겨 부르면, 세상의 영에 사로잡히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교자가 외치면, 그날부터 (설교를 들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이 잡듯 잡아댄다. 세상의 노래를 듣지 말고, 세상의 즐거움 또한 바라보지 말라고. 왜?     "설교자가 말했다. 그러한 것들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히는 짓이 된다고" 정말 그럴까? 우리가

할례. 이방인들에게 철저히 숨겨져 왔던 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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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자락을 덮고 있는 포피를 강제로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중략)...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창17:10~11 그리하면 할례를 행한 남자는 나이를 떠나 모두가 최소 3일간은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데, 육체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된다. biblematrix.com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 (Three days later, while all of them were still in pain) 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창34:24~25 이때 예상밖의 위험을 직면하게 될 경우, 할례를 받은 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고로 할례를 행한 자에게 할례 후 3일이 지나고, 4일째되는 그 날에 그가 무사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전능자가 그의 전능하신 손으로 할례자를 지켜주고 계신다 는 사실을 만천하게 알리게 된다. 그렇기에 육체의 할례를 누구보다도 명백하게 지켜 행하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의 인식을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advantage in being a Jew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value in circumsion 롬3:1 그들은 절대 고아와 과부처럼 (주님의 손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 아니다. 주님은 의인을 악인의 손아귀에 버려 두지 않으시며 시37:33 할례를 지켜 행하는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눈 앞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이 모든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already) 사랑을 입은 자라 롬11:28b 이 사실이 "유대인에게 성경, 곧 주님의 말씀을 맡기신 이유"이

예슈아의 제자가 살아야 할 삶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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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는 중에 누구든지 일(Work)을 하게 되고, 일한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게 된다. 이때 일의 대가를 중시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과정을 중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같은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바라보는 시각 또는 일을 시작하는 마음의 중심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사례를 나눠보고자 한다. 예슈아를 믿는 신앙인이든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든 모두가 '악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는 이웃에게 자신의 결과물을 제시하며 자랑한다. "나는 모두가 부러워 할 만큼의 재산을 가진 부자다"라고. 그리고서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재산의 규모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서, 역시 재산의 규모가 초라한 이들에 대해서는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그가 그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경위, 곧 과정을 살펴보면 '힘없고 약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강탈하여 얻은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재산을 얻은 '그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명될 때, 모든 이들은 동일하게 그에게서 등을 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자랑하는 그의 재산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경멸과 비난의 눈초리만을 보낸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과정이 정당하지 않으면 그 결과 역시 정당하지 않는다는 '오랜 역사를 통해 얻어진 진리' 때문이요. 이러한 진리는 독생자를 주시기 까지 사랑하셨던 세상(요3:16), 곧 야훼 하나님의 질서(order; kosmos, 요3:16)를 모든 이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모습이다. 그래서 예슈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일의 대가'를 얻는 그 과정에서 '믿지 않는 이들과의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 이를 두고 '분별해야 하는 필요성'이라 말한다. 내가 결과를 얻기 까지 그 모든 과정이 정당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콩 심은데서 콩이 나

십보라와 이혼하게 된 모세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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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es had divorced his wife, zipporah 탈무드는 '모세는 그의 아내와 이혼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게 되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시내산에 모인 허다한 무리들은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3일간의 구별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짙은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한 것은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백성이 듣게 하려 함이며 또한 영원히 네 말을 믿게 하려 함이니라(출19:9a.흠정역) 야훼 하나님께서 자기의 음성(voice)으로 모세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직접 목격하게 하시겠다고 한다. 즉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 내용을 백성들이 직접 듣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님의 계명을 명확히 지켜행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알리셨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 장면을 지켜 볼 수 있는 자리까지 백성들이 나아오려 하니, 당연히 거룩하게 준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첫째와 둘쨋날을 구별되게 지내는데, 셋쨋날에는 좀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셋째 날을 예비하고 너희 아내에게 가지 말라, 하니라.(출19:15) 우리들 각자의 아내에게 가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하지만 이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만 적용되는 명령이다. 이때 모세가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백성들은 남자들을 의미한다. 이후 시내산에 주님이 내려오신다.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더라. 그곳의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더라.(출19:18) 시내산에 엄습해 오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시각적 효과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에 나팔 소리가 오랫동안 나며 점점 더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으로 응답하시더라(출19:19) 야훼

주는 내 발의 등불이시다. 그런 분이 왜 어둠 가운데 오셔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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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환하게 비추는 때, 손전등을 켜 보았다. 그 손전등이 어디를 비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왜? 손전등보다 태양이 더 밝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이 비추는 시간에 우리는 손전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전등을 들고 자신의 갈 길을 비추는 자가 있다면, 우리 모두는 손가락질을 하며 그를 비웃을 뿐이다. 그럼 손전등은 어느 때 사용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까? 어둠이 이 땅을 덮을 때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어둠이 가장 짙을 때, 손전등의 진가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예슈아는 우리의 등불이라 기록되어 있다. 등불의 밝기는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대낮의 밝음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다. 따라서 등불은 대낮을 비추는 태양 빛 아래 거하는 이들에겐 하등의 가치도 필요성도 인정받지 못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마9:31b) 그렇기에 등불은 스스로 어둠이 짙은 시간대를 찾아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다. 짙은 어둠 아래에 거하는 이들에겐 절대적인 가치와 그 필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31b) 고로 예슈아를 나의 참 등불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의미를 대낮과 같은 밝은 빛에 속한 자라고 여기지 않고 이제부터는 어둠 속에 거하는 존재라 여기게 될 것이다. 아울러 자신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닌,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다만 죄사함을 받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예슈아의 뜻하심을 이뤄주는 자'로 살아가는 자임을 스스로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족하는 내 이웃'에 대해 정죄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실족하고 있는 중이닌까. The parable of the thousand talents 대신 예슈아께서 내 이웃에게 전달해 달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를 전달해 주면 된다. 연약한 내 이웃에게 전달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