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내 발의 등불이시다. 그런 분이 왜 어둠 가운데 오셔야 했을까?





태양이 환하게 비추는 때, 손전등을 켜 보았다.

그 손전등이 어디를 비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왜?



손전등보다 태양이 더 밝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이 비추는 시간에 우리는 손전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전등을 들고 자신의 갈 길을 비추는 자가 있다면, 우리 모두는 손가락질을 하며 그를 비웃을 뿐이다.



그럼 손전등은 어느 때 사용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까?






어둠이 이 땅을 덮을 때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어둠이 가장 짙을 때, 손전등의 진가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예슈아는 우리의 등불이라 기록되어 있다. 등불의 밝기는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대낮의 밝음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다. 따라서 등불은 대낮을 비추는 태양 빛 아래 거하는 이들에겐 하등의 가치도 필요성도 인정받지 못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마9:31b)



그렇기에 등불은 스스로 어둠이 짙은 시간대를 찾아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다. 짙은 어둠 아래에 거하는 이들에겐 절대적인 가치와 그 필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31b)



고로 예슈아를 나의 참 등불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의미를 대낮과 같은 밝은 빛에 속한 자라고 여기지 않고 이제부터는 어둠 속에 거하는 존재라 여기게 될 것이다. 아울러 자신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닌,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다만 죄사함을 받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예슈아의 뜻하심을 이뤄주는 자'로 살아가는 자임을 스스로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족하는 내 이웃'에 대해 정죄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실족하고 있는 중이닌까.



The parable of the thousand talents




대신 예슈아께서 내 이웃에게 전달해 달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를 전달해 주면 된다. 연약한 내 이웃에게 전달해 주고픈 예슈아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전달해 주면 된다. 즉 내가 예슈아께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와 같은 은혜를 내 이웃에게 베풀기만 하면 된다.



주님의 은혜는 결국 내가 전달해야 할 메시지인 셈이다.




내 이웃이 감동하여 예슈아께 무릎꿇고서 회개하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건 주께서 직접 행하실 것이니, 우리는 메시지 혹은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눠주는 그 역할만 담당하면 족하다. 사실은 나의 죄도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내 삶에는 여전히 범죄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내 삶의 등불이신 예슈아의 뜻대로 사는 자는 죄 없는 자가 아닌,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깊게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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