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란...
성경 속에는 저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저주의 형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무엇이 어떻게 생긴 게 저주라는 식의 설명이 없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무엇이 죄다'는 식의 죄의 실체를 설명하는 부분은 없다.
왜 그럴까?
이는 죄나 저주의 형태 또는 특정한 행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즉 우리가 죄나 저주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죄를 짓지 않고 저주를 대적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죄나 저주를 바라보는 순간, 죄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리라.
그것은
보는 순간,
묶인다.
따라서 죄나 저주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고 본다. 무엇이 유일한 방법일까?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죄 또는 저주라는 부분에 있어서, 특별히 영적인 사람에 한해서만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성도조차도 목회자나 은사자를 찾아가 곧잘 묻곤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게 잘한 것일까요?"
"제가 죄를 지었거나 저주받을 만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요?"
이러한 상황은 매우 흔하디 흔하다. 심지어 누군가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이내 곧잘 죄를 자복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자녀들이 세상의 유행가를 즐겨 부르면, 세상의 영에 사로잡히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교자가 외치면, 그날부터 (설교를 들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이 잡듯 잡아댄다. 세상의 노래를 듣지 말고, 세상의 즐거움 또한 바라보지 말라고.
왜?
"설교자가 말했다. 그러한 것들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히는 짓이 된다고"
정말 그럴까?
우리가 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한다.
목회자나 설교자 분들이 "그것은 죄입니다" 또는 "그것은 저주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행동은 죄가 되고 저주를 불러오게 되는 걸까?
성경을 아는 우리들이 익히 아는 인물이 있다. 발람 선지자다.
야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발락이라는 인물조차도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 비단 영적인 인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잘못했다고 하는 부분은 훤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죄나 저주에 관한 부분은 영적인 인물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발락은 이스라엘의 그릇된 행동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발람 선지자에게 요구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라"
그러나 발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께서 꾸짖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리요?"(민23:8.흠정역)
세상은 잘못을 지적한다. 왜? 눈에 훤히 보이는 부분이닌까.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며 정확하게 말하기를 "저주받을지어다"라고 외쳐댄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인간들의 시선, 곧 인생과 다르다. 그들의 생각과 같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민23:21.흠정역)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행한 모습들을 우리는 안다. 숱한 설교자들은 말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이방인으로서 우리들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한 가정이 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서 그 부모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이웃하는 사람이 잠시 방문하여 이 광경을 보고 거들듯 말한다. "어허~ 이놈이 그렇게 하는 건 잘못한 짓이야"라고 했다. 이 사람은 평소 아이의 부모와 사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녀를 혼내는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서 자기도 거들어 그 자녀를 혼내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에 대해 그 자녀의 부모는 정색을 하며 말한다.
"당신이 먼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내 아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지?"
"내 아이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잘못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내가 잘못이다 하면 잘못인 것이지, 당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야. 참견하지마"
이게 죄 또는 저주에 관한 모습이요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한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이는 없다. 나이들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다. 질병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무조건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의 답변을 듣게 되는데, 이는 노화단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따라서 나이드신 분들은 건강검진을 받던 받지 않던 노화로 인한 신체의 약화는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어떠한 의술로도 회복할 수 없는 신체의 약화다. 지혜가 있는 이들은 노화의 현상이 자연스러운 삶의 하나라 생각할 것이고, 이로써 괜실히 병원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지 않을 것이다.
내 삶에 죄가 된다면 죄가 될 것이고, 저주받을 만한 행동이라 말하면 그럴 만한 것들이 어디 한 두개 이겠는가. 털어서 지극히 작은 먼지만 나오는 게 아니라, 털뭉치도 떨어질 수 있기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제빠르게
"당신의 그 행동은 죄요 저주 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속히 내가 말하는 데로 행하여, 죄 사함받고 저주를 끊어내도록 하십시오"
라고 한다. 마치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제촉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라 했던 상황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성경 속 이야기가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그 말은 들은 이들은 죄와 저주를 지적하는 이의 훈계와 지시에 귀를 기울이고서, 그가 하라는 데로 열심을 내어 행한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였더니 죄와 저주의 문제에서 해방된 삶을 살게 되었을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역시 이와 같은 경험들을 해 보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 역시 경험을 했던 내용이다.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질병이 저주에서, 특히 가계의 저주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저주를 끊어내고자 무척 노력했었다.
하지만 결국 저주를 끊지 못했다.
왜 끊지 못했을까?
본시 "저주"라는 말 자체가 "끊어낼 수 없는 속박"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했듯이, 율법의 행위는 어떠한 저주도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는 영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없다. 그래서 하루에 성경 30장을 읽어 1년에 3독을 한다 할지라도, 하루에 2시간씩 3번을 기도한다 할지라도 저주를 끊어내지 못한다.
"저주를 끊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죄나 저주에 묶여버린 것이다. 그 결과 절대로 끊어내지 못하게 된다.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속박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저주라고 말한다. 이것이 #저주의_정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저주를 끊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숱한 정보를 수집하고 간증들을 들으며 성경 속 좋은 글귀들을 추려내어 부적처럼 삶 속 곳곳에 붙여 놓는다. 행동 하나 하나에 죄가 되는 건 아닌지 혹은 저주받을 만한 행동은 아닌지 조심스러워 한다. 매사에 "죄, 죄, 죄..."를 외치고, 틈만 나면 "그것은 저주야...그것은 저주야..."를 묵상한다. 늘 그의 생각은 죄 또는 저주로 가득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질 못한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다양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영화 속 이야기나 판타지 소설 등을 보면 이같은 내용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저주는 '저주를 거는 자'(술사)만이 풀 수 있다고 한다. 또는 저주를 푸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실 뿐이라고들 말한다. 이처럼 저주를 푸는 방법은 유일하다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야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입에서 저주를 푸는 방법이 설명되고 있다.
그렇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다. 우리가 죄나 저주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앞서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듯, '저주를 거는 자'는 사실 주님이시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것은 저주다'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저주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저주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더라도, (목회자나 은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분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분이시다.
"나는 너의 행동에서 잘못된 것을 하나도 못 봤는걸!"
"너는 죄를 짓지도 저주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단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이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너의 그 행동이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으니,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떻겠니?"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내가 주변 이웃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에게 권하여 주시는 팁이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개역개정)
이 말이 어렵다면, 흔히 아는 속담을 기억해 보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내 입에서 상대방에게 나아가는 그 말이 곱다면, 나를 향한 상대방의 말 또한 곱다는 의미다. 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사랑받을 만한 생활 팁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따라 해보라. 그분이 '하라'(Do it)고 말씀하신 부분들만 하루 종일 행하면 된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지 마라'(Don't it)고 명령하신 그 내용은 사실 시간이 없어서 관심도 두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실까?
"정령 네가 내가 말한 10가지의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였구나"
"하지 마라(Don't it)고 말한 8가지는 하지 않았고, 하라(Do it)고 명한 그 2가지를 온전히 행하였구나"
그런데 '하지 마라'(Don't it)고 한 내용만 머리 속에 담아둔 채, 하루 종일 하지 말아야 할 8가지만 생각했다면 어떻게 될까?
"너는 내가 하지 말라(Don't it)고 명한 그 8가지의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였구나"
"하지만 내가 행하라(Do it)고 명한 그 2가지는 전혀 하지도 않았구나"
하지 말라고 한 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고, 보지 말라고 한 것은 안 보면 된다. 괜실히 그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쳐다보지도 않으면 되었다. 대신 먹으라고 허락해 주신 숱한 열매들만 바라보았더라면, 에덴의 동산에서 실족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다.
우리는 주님이 하라고 명하신 것만 행하면, 죄의 문제와 저주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죄 문제와 저주를 끊어내는 역할은 주님이 하실 부분이기 때문이다. 죄와 저주는 주님이 생각하고 고민할 부분이고, 우리는 주님이 하라고 하는 그 부분만 열심을 다해 행하면 된다.
그렇기에 #죄의_실체는_무엇인가' 또는 #저주란_무엇인가'라는 등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대신 우리들이 고민할 바는 단 한 가지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하는 부분에서만 고민하면 된다.
이것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는 일용할 양식이요 우리가 무엇과 동행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3끼의 식사가 아니다. 주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뜻을 일용할 양식이라 말한다.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그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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