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키는 삶 - 인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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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잠시 몇 일간 집을 비울 일이 생겼다. 자신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를 철저히 하는 아내. 냉장고에 한 동안 먹고 지낼 수 있는 반찬과 밑반찬 등을 요리해 놓았다. 몇 일간 빨랫거리가 쏟아져 나와도 될 만큼 입을 옷가지를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도록 몇 가지의 충고를 한다. "냉장고에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 음식들을 먹으세요" "빨래가 나오면 절대로 빨래는 하지 말고 빨래통에 넣어두세요" "늦은 밤에 음식 시켜 먹지 마세요" "자녀들은 서로 싸우지 마세요" "컴퓨터 게임 등은 하지 마세요" "TV보는 것 하지 마세요" "집에서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세요" 총 7 가지의 충고(규칙)를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자! 이제 남아 있는 이들은 이 많은 규칙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7 가지의 규칙을 모두 지킬려니 너무 막막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때 조금의 인식 변화를 도모해 본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pixabay (below all) 먼저 7 가지의 규칙들을 "행하라"(Do)는 부분과 "하지 마라"(Don't)는 두 유형으로 나눠보자. "냉장고 안의 음식을 먹어라"라는 부분과 "기타치며 서로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놀아라"는 부분 은 "행하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는 "하지 마라"는 부분이다. 그럼 쉽게 생각해 보자. "하지 마라"는 부분은 그저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으려면 "관...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자 만이 야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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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Impossible? 십계명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십중 팔구 내지는 열이면 열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쉽게 생각해 보자. 휴전선 초소에 근무하는 한 군인에게 그의 상관이 명령을 내렸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내일 오전까지 무력으로 북한을 섬멸하라" 한낱 초소 하나를 겨우 지켜내는 한 명의 군인에게 이같은 명령을 하달했다면, 그 상관은 정상적인 군인일까? 지혜로운 자가 명령(command)을 내린다면, 반드시 지켜 행할 수 있는 수준이지 않을까? 우리는 예슈아를 닮아야 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개역개정) 예슈아께서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개역개정) 완전하게 또는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럼 우리도 율법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음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영상: 머털도사 1부> 머털이는 왜 '허공에 놓인 좁은 길을 속히 걸어 오라'는 스승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했을까? 어떤 변화가 생겼기에 머털이는 기쁜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좁을 길에 발을 내딛었을까? 십계명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면 다음과 같다. <하지 마라> ---- <하라> ---- <하지 마라> 양쪽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놓여 있다. 넘어와서는 안 되는 것들로서 이것들을 지키지 못할 경우 "죽을 것이다"는 두려움을 갖는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중앙에는 "하라"는 것이 놓여 있다. 즉 마음껏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구조는 머털도사의 한 장면과...

썩고 있는 내 재능이 안타까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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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기도한다. 내 삶에 변화가 찾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시간만 흘러가자 내 마음은 조급해 진다. 더더더 나의 뛰어난 재능이 마냥 썩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런 시간을 야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함인데,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아무리 진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보다는 잘 다듬어진 보석이 귀하고, 아무리 지혜있다 자랑 할지라도 훈련받지 않는 그에게 비행기의 운전석을 맡기진 않는다.  Photo by Arūnas Naujokas on Unsplash

섬김(헌신)은 어느 누가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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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을 대접하려 한다. 이때 어느 누가 음식 장만을 해야 할까? 요리를 잘 하는 아내가? 혹은 (요리엔 형편없지만) 농담을 잘 하는 내가? 여러분들이라면 어느 누구에게 요리를 맡길 것 같나요? pixabay (below all) It's Nonsense! 이 경우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순 없겠으나 어느 누가 "의미없는 짓"을 행할 수 있을까? 이건 상식(common-sense)이다.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이는 당연히 "아내"다. 그 이유 또한 너무나 합당하고 모두가 부인할 수 없다. "요리를 잘 한다" 는 이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 함을 잘 안다. 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안다. 위의 경우에서 처럼 쉽게 생각해 보자. (성령의) 열매를 맺은 자와 열매를 맺지 못한 자가 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 "무언가를 나눠주는 일"을 부탁하려 할 때,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기는게 합당할까? 이 또한 그 답은 너무나 명쾌하지 않을까? 무언가 나눠줄 만한 것이 있는 자에게 일임을 해야 그가 나눠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은 자에게 "당신이 수고하여 맺은 그 열매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는게 상식이리라. 이것이 상식일진데, 실제 우리의 삶 또는 교회(공동채) 안에서의 모습은 어떠한가? 섬길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열정이 보인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다듬어지지 않은 채) 재능이 보인다는 이유 만으로 섬김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훌륭한 요리는 심히 강팍해진 심령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형편없는 요리는 나를 아끼는 이 조차도 내게 등을 보이게 할 수 있다. 한편 재능만 있으면...

[ 그날이 도적과 같이 임하리니] 주의 날을 준비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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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Erik-Jan Leusink on Unsplash 근래에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40살이 채 되지 않은 자매였는데, 오랜 투병 끝에 암으로 하늘 나라로 갔다. 투병하던 중에는 "성경 말씀"을 잘 받아 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의 마지막 수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죽음"을 감지했는지, "성경 말씀"을 잘 받아 드렸다고 한다. 호흡이 어려워 힘들게 가뿐 숨을 들이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하는 모든 말씀에 순응하던 그녀. 이내 수술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장에서 화장터까지 운구행렬과 동행하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옛말에 "평소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 는 말이 있다. 대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짙었는데, 오늘은 이 말이 나의 마음 속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Photo by Matthew Henry on Unsplash 죽음이란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가 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한번 죽는 것 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이요 그 후에는 심판 이 있으리니 (히9:27) 그런데 주께서 '정하신'(appointed) 그 때와 시기는 누구도 모른다. 결정하는 '권한은 오직 창조주 야훼 하나님에게만'(행1:7) 있으시니, 그분만이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이 임하는 정확한 그 때와 시기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죽음이 임한다"는 상황을 직감(sense)적으로 미리(이미; already)알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preparing)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이들이 더러 있다. <직감>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sense)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5:...

삶에 고난이 임하면 두려움에 싸인다. 그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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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below all) 삶에 고난이 임하면 두려움이 우리를 찾아와 극심한 내적 갈등을 빗어낸다. 내적 싸움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두려움에 지배 당하면서부터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진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도울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맹인"같은 자가 되어 버린다. 지옥을 체험한 분들의 간증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극도의 허기 속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음식을 자신의 입에 넣고자 손으로 땅을 휘젖는 허다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의 팔은 절대로 굽어질 수 없는 단단한 철재 막대처럼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겨우 잡았다 할지라도, 그 음식을 입 안으로 넣을 수가 없다.  허기 때문에 두려움에 쌓인 이들은 음식을 자신의 입 안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에 고함을 치며 운다.  이렇게 슬프 통곡하듯 울고 있는 이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야가 조금만 더 넓게 볼 수 있다면, 그들은 "내 옆에 나와 사정이 똑같은 또 다른 사람이 있어"라고 하는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 나는 내 입에 음식을 넣을 순 없지만, 타인의 입에는 넣어줄 수 있어 " " 그러면 내로 인하여 음식을 먹게 된 그가  내 입 안에 음식을 넣어줄 수 있을거야 " 라는 소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지옥이다. 지옥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이기에,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들처럼 "매우 좁은 시야"만을 갖게 된다. 땅에 떨어진 음식을 보았을 때, 그저 자신의 입 안에 넣을 생각(...

[수학으로 보는 성경]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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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중략)...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마25:40.흠정역) 가장 작은 자 혹은 가장 천한 자에게 행했을 뿐인데, 그것을 "왕"(almighty king)은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편의 시 또는 음악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때 느낌 감동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왕"은 누굴까? 마25장(흠정역)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중략)...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하리니 그에게는 "아버지"(마25:34)이 있다. 그런데 왕은 ▷ 주렸었고 ▷목말랐었으며 ▷ 나그네였었다. ▷헐벗었었고 ▷병든 자였으며 ▷ 사로잡힌 자였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름부음(부르심)을 받아야 했을까? 사61장(흠정역) 1.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중략)...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고 ▷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 결박된 자들에게 감옥에서 놓임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요, 2. ...(중략)... ▷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며 우리는 "왕을 찾아 길을 떠나는 자"의 신분을 얻은 자였다. 그러나 오늘은 "수학으로 보는 성경"을 통해 성경 말씀의 한 내용을 "증명"해 볼 수 있길 바란다. 초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