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고난이 임하면 두려움에 싸인다. 그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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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고난이 임하면

두려움이 우리를 찾아와 극심한 내적 갈등을 빗어낸다. 내적 싸움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두려움에 지배 당하면서부터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진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도울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맹인"같은 자가 되어 버린다.


지옥을 체험한 분들의 간증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극도의 허기 속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음식을 자신의 입에 넣고자 손으로 땅을 휘젖는 허다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의 팔은 절대로 굽어질 수 없는 단단한 철재 막대처럼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겨우 잡았다 할지라도, 그 음식을 입 안으로 넣을 수가 없다. 허기 때문에 두려움에 쌓인 이들은 음식을 자신의 입 안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에 고함을 치며 운다. 

이렇게 슬프 통곡하듯 울고 있는 이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야가 조금만 더 넓게 볼 수 있다면,

그들은 "내 옆에 나와 사정이 똑같은 또 다른 사람이 있어"라고 하는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입에 음식을 넣을 순 없지만,
타인의 입에는 넣어줄 수 있어"

"그러면 내로 인하여 음식을 먹게 된 그가 
내 입 안에 음식을 넣어줄 수 있을거야"

라는 소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지옥이다.

지옥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이기에,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들처럼 "매우 좁은 시야"만을 갖게 된다. 땅에 떨어진 음식을 보았을 때, 그저 자신의 입 안에 넣을 생각(욕망; 식욕)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옆 사람과의 "협력"(합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자신의 주변에는 "능히 도울 수 있는 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외로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도움은 하나도 없어"
라고 비관만 한다.

지옥은 우리가 죽어야만 도달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얻지 못한 채 그저 고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면, 그래서 비관하고 낙심하는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런 분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육신을 떠나게 된다면, 그는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된다. 육신이 살아 있는 이 현실은 사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있을 때,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훈련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앞선 지옥체험담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 허기진 내 배를 채우고자 한다면,
  • 먼저 옆 사람의 배를 채워줘야 한다

는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마7:12.흠정역)
의 말씀을 실제로 지켜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의 여부를 떠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길 좋아하고, 역시나 듣기를 좋아하는 말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care)를 할 때,
상대방도 나를 배려한다.

내가 먼저 상대를 귀한 분으로 여겨줄 때,
상대방도 나를 귀하게 여겨준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기란 그리 녹녹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현실적인 난위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나누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하길 바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
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는 경황없는 행동을 한다. 즉 사려깊은, 생각하는 자의 모습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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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 또는 "노예"(slave)의 모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떻게 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비유를 생각해 보자.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로 비교해 보자.

눈 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 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내겐 "허기"가 찾아온다.
이때 질문이다.


  • 허기를 두렵게 여기는 이는 누구일까?
  • 살아 있는 자일까? 아니면 죽은 자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곧 허기에 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기가 그의 온 몸을 헤짚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말대꾸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당초에 가졌던 "그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허기로 인하여 더 큰 재앙, 곧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이미 죽은 자는 장차 올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의도했던 그 마음을 지키고서, 변화되는 상황을 즐길 뿐이다.




허나 살아있는 자는 다르다. 모든 변화에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허기가 들면 어떻하지?"
"이러다가 죽는거 아냐?"

"돈이 없으면 어떻하지?"
"멋진 차와 화려한 옷을 입지 못하면 어떻하지?"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될텐데."
"조롱거리가 되는게 너무 두렵다."

우리들의 옛 조상들을 되돌아 보자.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분들의 삶을 회상해 보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분들이 5성급 호텔에서 호화호식하며 생활했을까? 안락한 침대에서 따스한 온기를 덮고 잠을 청했을까? 일본군과의 싸움 또는 사로잡힐 경우, 그들에게 찾아올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 흔들림이 없는 강한 신념

등은 삶의 모든 변화에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삶의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거추장 스러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여러분.
먹을 수 있고, 잠을 청할 수 있으며, 입을 수 있는 의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까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상관의 부당한 대우, 부당한 업무 진행 등도 "직위를 보존 받아야만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전제로 강요당하듯.

염세주의가 아닌, 세상을 소탈하게 살아가는 것.

변화에 의해서,
변화가 있어야만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지 마시고

내가 즐기는 마음으로 고난을 극복하며 나아가기 때문에
변화가 나와 내 삶을 따라 온다.
이런 삶이 참되고 멋진 삶이지 않을까요?

돈을 벌고자 한다면, 돈에 집착하지 마라.
대신 돈을 버는 삶의 지혜에 관심을 가져라.
그러면 돈이 우리를 따라 올 것이다.

영적 모든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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