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비밀만 아는 것은 우리에게 무익한 것이다.



고대의 신비한 문헌들이 있다.

그 문헌들에는 창조주 또는 창조의 절대능력에 관한 신비로운 비밀을 담고 있다. 툼 레이더스 또는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영화는 창조주의 그런 신비롭고 경이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잘 그려 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주의 능력이 담겨있는 유물(아티팩트)을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다. 제 아무리 많은 유물들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무용지물, 곧 자신들에게 무익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유물에 담겨있는 그 내용을 이해 또는 해석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소유했으나 소유하지 못하는 자와 같은 무익함만이 남는다.







마찬가지다.

성경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적 비밀들이 담겨 있다. 각종 설교와 강연 그리고 문헌들은 늘 하늘왕국의 영적 비밀을 소개한다. 이토록 많은 메신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더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메신저의 알림이 있음에도 깨어나는 이들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말해 '주님의 뜻대로 사십시오'라는 설교 내용을 들었다고 하자. 이에 대해 질문자가 답을 한다.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가요?"


설교자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경우,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매우 추상적이다. 즉 창조의 신비한 능력을 담고 있는 고대 유물 그 자체와도 같다. 고대 유물 속에 담긴 내용을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진정한 나의 것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단어가 내 삶의 어떤 방식을 지칭하는 지 정확하게 겨냥되어야 한다. 흔히들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들었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소그룹 모임을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의 말씀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들을 한다. 이것은 고대 유물 속에 담겨있는 고대 언어를 분석하여 해독함으로써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주님의 뜻과 비밀이 담겨있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믿음이라는 단어와 같은 하늘의 언어로만 전달되고 기억되어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 단어는 반드시 땅의 언어, 곧 내 삶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바뀌어야 한다.



By House Mix Blog



가령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한 개인의 방식을 설명하자면, 그는 이른 아침에 기도를 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바램을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서 주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내용을 듣고자 가만히 기다리는 게 그의 아침 기도다. 주님은 마음 속 말이나 또는 생각, 그리고 영감과 같은 느낌 등을 통해 그에게 그날 필요한 내용들을 들려주신다. 그 사실을 들은 그는 그날 그 일을 위해 전심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믿음으로_사는_것이란 간단하다.




얼마나 많은 계명을 지켜내느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주님의 뜻이라도 소중히 지켜 행하는 것

에만 관심이 있다.




소위 '오늘 하루는 아내를 도와 집안 일을 해 주길 바란다'는 주님의 뜻을 들었다면, 힘들고 지칠 수도 있겠으나 아내를 돕는 일에 자신의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성경 읽기나 기도하기 등등의 다른 일들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자녀들의 공부를 봐주는 것이나 자녀와 놀아주는 것도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바라시는 그 한 가지의 일에 자신의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삶에 정확히 표현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각양각색이다. 어느 누구도 같은 삶을 사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그 말의 의미 역시 각자마다 다 다르다. 고로 #믿음의_분량 또는 #믿음의_수준에_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삶의 수준 역시 달라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지만, 이렇듯 영적 비밀이 담긴 '믿음'이라는 단어가 내 삶의 언어로 설명 가능한 단어로 바뀔 수 있을 때 '믿음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듣는다는 게 내게 유익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겐 또다른 자유함이 선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유창한 설교를 많이 들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경 속 내용을 주구장창 다독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해 본다.



단 한 줄의 말씀이라도 내 삶 속에 정확히 그려낼 수 있는 그 말씀을 찾아내는 그것이 성경을 사모하는 진정한 모습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본다.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데 적용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성경 구절들'을 곧잘 암송한다고 해서 그게 자랑스러울 건 하나도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그 성도가 오히려 더 자랑스러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롬2:13)



많이 듣고, 많이 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말고,

단 한 줄의 말씀이라도 지켜 행하는 그 삶에 소망을 품으시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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